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

강남버그
Gangnambug

소개: 강남버그

강남만큼 ‘버그’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가장 안전하고 검증된 길을 제시(또는 강요)하는 곳, 강남은 어느 순간 지역을 넘어서 시스템이 됐다. 강남버그는 강남 자체가 대한민국의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버그’라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명제로서 증명하는 것이 이 팀의 목적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사실 초복잡성의 시대에 단순히 ‘오류’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은 없다. 이 팀이 생각하는 버그는 오류라기보다는 예측 불가능성에 더 가깝다.[↓] 어떤 시스템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는 시그널로서의 버그는 때로 그 시스템의 존속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 강남버그는 ‘강남’이라는 지역, 제도, 또는 현상을 상징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건드린다. 사교육, 부동산, 도시 개발이라는 핵심어들 사이로 경쟁, 계급, 욕망 같은 관련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팀의 태도에는 때로는 비판과 자조, 때로는 관조와 유머가 뒤섞이며 섣부른 판단을 적절히 차단한다.

#버그 #디버깅 #핵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때, 개발자의 실수 등으로 프로그램이 의도치 않은 동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버그(bug)라고 합니다. 프로그래머는 버그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찾아 프로그램을 고치게 되는데 이렇게 프로그래머가 버그의 근본 원인을 찾고, 버그를 제거하는 과정을 디버깅(debugging)이라 합니다. 이때, 프로그래머의 능력으로 근본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그것을 고치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예: 시간이나 인력이 부족) 근본 원인을 고치기 보단 일단 미봉책으로 버그가 보이는 현상만 대충 땜빵으로 고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핵(hack) 라고 합니다.

#돌이킬수없는핵 #돌이킬수없는버그

버그가 없는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따라서 버그를 만드는 게 두려워서 기능을 구현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경제적, 효율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가 없습니다. 단, 비행기에 들어가는 제어장치와 같이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는 효율성을 포기하고 버그를 없애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단순히 ‘핵과 버그 둘 중에 무엇이 더 위험성이 크다.’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핵도 버그도 둘 다 돌이킬 수 없다면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인데요. 핵은 뭐가 되었든 이미 존재하는 버그(예상치 못한 현상)를 고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고치려는 버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물론 언젠가는 핵을 걷어내고 근본 원인을 찾아 올바르게 버그를 고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핵도 ‘돌이킬 수 없는 핵’을 만들어 두면 나중에 올바른 방법으로 다시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래도 일단 눈에 보이는 문제는 고친 상황이라 아주 큰 문제라 할 순 없죠. 하지만 나중에 다른 문제가 생기면 예전에 만들어놓은 핵 때문에 그 새로운 문제를 고치는 게 너무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가 바로 돌이킬 수 없는 버그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그와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버그’는 이미 고칠 수 없는 버그입니다. 하나의 버그를 수정하는 것이 이미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프로그램 안에서 또다른 치명적인 버그를 발생 시키거나 시스템 전체를 다시 디자인 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순간을 넘기는 핵 조차도 적용할 여지가 없기에 위험성이 더 큰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현재 강남 도시 개발의 버그를 수정한다는 것은 단 한가지 요소를 고쳐서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현질

유저가 사용하는 핵은 버그를 고칠 때 사용하는 핵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원하는걸 이루기 위해 ‘숏컷(Shot-cut)’, 즉 최단거리로 접근하는 것은 같지만 유저는 개인의 이득을,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의 원활한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개인의 이득만을 위한 유저의 핵은 다른 유저들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프로그램 안으로 침투합니다. 하지만 요새는 유저의 핵과는 또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게임으로 예를 들면, 핵으로 무너지는 밸런스보다 현질(돈 내고 아이템 사는 등)로 무너지는 밸런스가 더 크다고 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돈을 쓰는 방법으로 승패를 좌우하고, 어떤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해킹기술로 승패를 좌우하는 겁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것은 게임 설계의 문제 입니다. 승패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이라면 핵 또는 현질로 인한 유저 수의 감소 효과는 미미하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유저가 사용하는 핵은 프로그래머가 기술적으로 계속 방어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질로 무너지게 된 게임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돌이킬수 없는 버그와 같이.

강남버그는 하나의 영상 작품, 두 개의 참여형 프로젝트, 그리고 도시 개발 관련 리서치를 진행했다. 강남구 삼성동에 지어질 예정인 초고층 빌딩의 건설부지에서 드론 촬영을 통해 그 높이와 시점을 가늠해보려는 오르고 또 오르면강남은 여전히 개발 중이며 수많은 고층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오르고 또 오르면은 현재 강남에서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예정인 지상 105층짜리 건물이 이미 지어졌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영상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이 건물의 부지 위에서 그 엄청난 규모와 높이를 가늠해보려고 올라가는 드론의 시선을 따라간다. “595미터라는 높이의 시점에서 확보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초고층 건물의 건설 부지를 촬영하는, 또는 촬영하려고 시도하는 드론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상승에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시점의 위계를 이용해 다루고 있다. [영상 보기]은 15분짜리 3채널 영상이다. 촬영자의 시선과 드론의 화면이 교차되는 와중에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건물의 높이를 상상해보려는 노력은 수신 오류로 버벅대는 드론의 한계로 좌절되고, 난데없이 웅장한 음악과 이카루스 신화를 등장시키며 상승에의 근원적 욕망에 대해 언급하는 이 작품은 강남과 버그를 완벽하게 결합시킨다.

참여형 이벤트의 성격으로 기획된 강남버스강남이라는 지역을 관광 투어 상품으로 상정해 이뤄지는 버스 투어 이벤트다. 2020년 6월 25일, 강남버스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청담동과 대치동, 구룡마을 입구, 강남역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운행한다. 버스는 4개 지점에 정차하며, 이때 배우, 노래강사, 워킹맘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가이드가 탑승해 강남의 특정 지역과 연관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버스에 탑승한 관객은 창밖으로 보이는 강남의 실제 풍경과 가이드들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관객 개인이 경험한 강남에 대한 기억과 인식을 바탕으로 “강남은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된다. [영상 보기] / [가이드북 보기]천하제일 뎃생대회석고 소묘는 2000년대 초반까지 미대 입시의 필수 과제 중 하나였다. 대형 입시 미술 학원에서는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석고상을 빛과 주변 환경에 관계없이 그려낼 수 있도록 암기식 수업을 시켰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미술학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변별력이 저하되고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인식이 늘어나면서 석고 소묘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폐지됐다.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석고뎃생을 주제로 한 참여형 이벤트다. 석고 뎃생 대회 참가자들은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실제 석고상을 그려 제출한다. 이 드로잉들은 온라인 투표 사이트에 게시돼 순위가 매겨진다. 이런 방식은 합격을 위해 그림조차 외워서 그렸던 시절을 상기시키지만, 이벤트로서의 소묘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그 어떤 것도 입시라는 목적이 붙으면 본래의 취지가 퇴색돼버린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석고 소묘는 사라졌지만 입시와 사교육의 매커니즘은 여전히 작동 중인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영상 보기]

천하제일 뎃생대회 결과 투표
작품 마흔세 점 중 자신의 ‘최애’ 작품에 투표해주세요!
기간: 2020년 9월 18~30일
발표: 2020년 10월 5일 강남버그 인스타그램 계정
는 ‘코로나’라는 강력한 버그를 만나, 처음 계획과는 약간 다르게 진행됐다. 강남버스는 강남 지역을 일종의 관광 상품으로 상정해 이뤄지는 버스 투어 이벤트로, 운행 횟수를 최소화한 후 참여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영상물의 형태로 귀결됐다. 투어 가이드 역할을 하는 퍼포머들의 이야기들은 강남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인식을 복합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강남을 하나의 이미지 안에 가두는 것을 막는다.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휴관 때문에 시기와 장소, 규모가 모두 조정됐지만, 결과적으로는 2020년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면서 과거의 입시 제도를 상기시키는 독특한 분위기의 이벤트로 진화했다. 입시를 위해서는 더없이 중요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하면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기술, 실제 석고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형 학원에서 가르치는 정형화된 이미지에 가깝게 그리기 위한 훈련으로서의 석고 소묘는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키면서 본질이 호도되는 대학 입시와 사교육 문제의 본질을 건드린다.

마취 강남마취란 무감각 또는 통증에 대한 인지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통증의 소실과 더불어 의식의 소실도 내포하고 있다. 기억 상실처럼. 강남은 여전히 개발이 한창이다. 불과 50년이 채 되지 않은 건물이 한순간 소실되는가 하면 어릴적 뛰어놀던 그 동네는 새로운 아파트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렇게 새로운 기억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언론에서 강남의 마지막 대규모 개발이라고 이야기하는 개포동 아파트 단지, 삼성동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그룹 GBC 착공 등 강남은 여전히 개발 호재가 많다. 이런 개발들은 이미 서사 없는 타워의 정체성만 가득한 강남의 고유성을 지킬 것이냐 파괴할 것이냐는 의문을 남긴다.대출 규제, 중과세 등, 강남 쏠림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부동산의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런 정책들에 이미 강남은 ‘무감각’해졌다. 강남은 지금도 집도가 끊이질 않는다. 그 과정에서 광막한 사이트가 비워졌다. 이는 다음 시술을 위한 마취 단계. 깨어나지 못한 도시. 강남이다.은 병리학의 시선에서 강남의 도시 개발을 해석해보려는 시도다. [↓] 1960년대 이후부터 정부의 주도적인 계획에 의해 개발돼, 현재도 수많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새로 지어지고 있는 강남은 한국의 어느 곳보다 현재성이 강조되는 곳이다. 강남을 기억과 통증, 의식이 소실된 채 다음 시술을 위해 마취된 상태의 도시로 바라보는 이 리서치 프로젝트는 건축을 중심으로 이곳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전이

도시의 자부심은 그 안의 다양성과 이질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1980년 ‘오렌지족’으로 인해 형성된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인기는 2000년 초 신사동 가로수길로 옮겨간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가로수길로 밀려난 상인들이 빠르게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동의 전성시대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경리단길 인기의 여파로 생겨난 이른바 ‘리단 현상’으로 이름에 ‘~리단’이 붙은 상업 거리들이 서울 곳곳에 생겨난 까닭이다. 지금은 다시 도산공원으로 그 흐름이 옮겨가는 듯하다. 에르메스 매장을 중심으로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들이 들어선 터에 준지 플래그 숍,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퀸스마마 마켓 등이 들어서 콘텐츠가 풍성해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귀국한 유학생들에게 이 동네는 익숙하다. 자본이 순환하면서 동네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유착 1: 교회 대형화

1970년 유례없던 대형 아파트가 생겨나며 주민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그리고 종교는 그 틈을 파고 들었다. 오늘날의 온라인 강의와 회의 전에 ‘비디오 선교’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교회가 지닌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다.

#배양: 도산공원

1971년 4월 착공한 9,075평 규모의 도산공원은 1973년 11월 9일 문을 열었다. 이어 다음 날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해와 미국에서 모셔온 부인의 유해를 함께 도산공원에 이장했다.

#증상

청담동 상권은 압구정 로데오 거리와는 달리 지금까지 그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새롭게 단장한 버버리를 시작으로 루이 비통, 디오르 등 명품 브랜드들이 줄지어 새로운 플래그 숍을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8위를 기록할 만큼 명품을 많이 소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비 행태도 한몫했다. 이곳은 도쿄의 긴자, 아오야마에 버금가는 거리가 형성되면서 건축가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송은문화재단이 선택한 헤르조그 드 뮤론의 국내 첫 프로젝트도 공사가 한창이다.

#청담동주택단지

1970년 후반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청담동 일대가 빠르게 빌라촌으로 탈바꿈한 것은 토지주와 주택 소유자, 건설업체 간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단독 주택은 60~90평으로, 지은 지 20년 이상 된 노후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유지 관리에 어려움이 따르나 땅값이 비싸 팔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건설업체에서 단독 주택을 6~10동씩 사들여 고급 빌라를 신축하면 사업성을 맞출 수 있을 뿐 아니라 신규 시장 개척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논현동 주택 단지와 달리 청담동은 인근에 지하철역이 없어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지역이 높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재관류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사업은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 공간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연면적 16만 제곱미터로, 잠실 야구장과 맞먹는 규모다. 삼성역과 봉은사역 사이를 잇는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는 서울 지하철 2호선, 9호선 환승을 비롯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A 노선과 C 노선이 정차하고 위례신사선과 향후 고속철도까지 정차할 예정인 초대형 복합 환승 센터다. 기존의 영동대로 공간은 도로를 지하화해 광장 형태로 조성할 계획이다. 지상 구간은 차 없는 도로가 되면서 녹지 광장으로 조성된다. 인근에 위치한 잠실동도 수혜가 기대된다. 종합운동장의 경우 스포츠, 문화, 상업, MICE 기능까지 갖춘 스포츠 문화 복합 단지로 재탄생하게 된다. 주경기장을 리모델링하고 야구장을 한강변으로 이동하는 등의 종합 운동장 재구성 사업이 계획돼 있다. 컨벤션과 호텔 같은 대규모 전시·숙박시설까지 갖춰 코엑스와 연계한 우리나라 MICE 산업의 중심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풍선확장술

척추 협착증에 대한 새 치료법으로 신진우(서울 아산병원 교수)에 의해 개발됐다. 이는 좁아진 척추 신경 통로에 가는 관(카테터)을 이용해 풍선을 직접 넣고 부풀려 여유 공간을 넓혀주는 시술법으로 난치성 척추 협착증 환자의 만성통증 감소 및기능을 개선했다. 환자의 증상이 실제 협착된 추간공의 여유 공간이 늘어나서인지 확인하기 위해 풍선확장시술 전·후 조영제를 투여해 삼차원 영상에서 조영제 확산 정도를 비교한 결과, 시술 전에 비해 추간 공내 확산 정도가 지름은 평균 28퍼센트, 부피는 평균 98퍼센트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신경주사요법과 신경성형술은 만성 난치성 환자의 경우 그 개선에 한계가 있으며 기존의 물리적 유착 제거와 약물에 의한 유착 제거가 모두 가능하도록 고안됐다.

#이식

과감한 이식이 진행됐다. 강북에 위치한 명문고를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1966년부터 1980년 사이 서울의 인구는 하루 900명씩 늘어났는데 이 시기 서울시 인구 증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었다.

“1966~80년의 15년 동안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500명의 인구가 늘었다.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롭게 늘어난 셈이다. 매일 22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통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돼야 하고, 매일 1,340킬로그램의 쓰레기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손정목, 서울 도시 계획 이야기 4, 290쪽

서울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주택과 상하수도의 부족, 슬럼가의 확장과 교통 혼잡, 학교 과밀과 사회 범죄의 증가 등 많은 문제를 동반했다. 무엇보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유사 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의 인구를 억제하고, 강북에 밀집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는 방안이 절실하게 요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인구 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라”고 지시한 것은 이 같은 상황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1972년 10월 28일 문교부가 서울 도심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점차 심각해지는 도심 공해에서 학생들을 벗어나도록 하고, 서울 도심의 과밀 인구를 분산시킨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가 이전 대상으로 지목된 이유는 당시 고등학교 진학률이 50퍼센트에 이르러 인구분산 효과가 컸고, 규모가 큰 대학보다는 서울 사대문 안에 밀집된 고등학교를 이전하는 게 용이했기 때문이다.

#테헤란로 ‘당당한 자본’

제5공화국 정권은 1986년 아시안 게임에 이어 1988년 올림픽 경기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종합적 통치 프로젝트로서 스포츠 메가 이벤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었다. 이른바 ‘3저 호황’이라고 하는 이런 결정적 호조건으로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의 결과인 ‘한강의 기적’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개의 대규모 국제 행사를 치르기 위한 범국가적 준비가 시작됐다. 새롭게 조성된 잠실 지구로 접근하기 위한 교통로와 주변 도시경관 정비, 부족한 경기시설 확충 및 정비, 외국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 마련 등 직접적인 관련 시설 준비뿐 아니라 광범위한 도시 미화와 경관 정비 작업이 이뤄졌다.

#절제

올림픽을 앞두고 관광호텔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84년 르네상스 호텔을 준공(삼부토건)한다. 역삼동에 들어선 이 호텔은 강남에 있던 유일한 대형 호텔로 주말 또는 휴가 기간에 다양한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사업 성과를 이룬다. 1990년 초반 잠실 롯데호텔을 시작으로 강남에 많은 호텔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경쟁력을 잃어간다.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인근 유흥업소와 연계해 불법 행위를 함으로써 영업정지를 피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한 경영악화로 결국 폐업하고 2017년 철거하게 된다. [도면 보기]

#거부반응

도시 지형은 도시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 페리의 근린 주구론은 평지를 기반으로 한 계획이지만 강남은 경사 지형인 곳이 많다. 여기에 격자식 구조를 얹으니 그리드가 변형됐다. 또한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여러 이권이 개입하면서 사선형 그리드가 형성된다.

#유착 2: 우선미(우성-선경-미도)

슈퍼블록은 때로는 잘게 쪼개지는가 하면 목적에 의해 융합되기도 한다. 계획도시에서 순수한 조닝(Zoning, 도시 계획이나 건축 설계에서 공간을 사용 용도와 법적 규제에 따라 기능별로 나누어 배치하는 일.)은 의미가 없으며 도시적, 사회적, 기능적 혼합이 현대 도시론의 주된 부제로 부각된다. 2015년 은마아파트는 현상설계를 통해 유엔 스튜디오 안을 채택한다.

하지만 조합원 간 갈등으로 인해 원활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이안은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여기에 자극받은 길 건너 우성-선경-미도(언론은 이를 ‘우선미’로 부른다.)는 조합을 형성해 재건축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이 ‘빅딜’은 오직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 형성됐다. 청실아파트가 이미 ‘래미안 대치 팰리스’로 재탄생했고, 그 가격이 대치동 최고가를 연일 갱신 중이다.

#투석

양재천은 길이 18.5킬로미터로, 경기 과천시의 관악산에서 서울 서초구, 강남구를 가로질러 탄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한때 오염이 심했던 양재천은 이제 생태계가 되살아나 자연 하천으로 거듭났다.

‘1982년 초만 해도 논밭과 구릉지로 찬바람이 몰아치던 개포지구가 이제 시가지의 모습을 서서히 갖춰가고 있다. (중략) 지구를 동서로 가르고 흐르는 양재천이 쾌적한 시가지의 강변공원 역할도 할 수 있도록 가꿀 계획이다. 일곱 개의 교량이 놓이고 녹지 대를 두른 제방 도로가 양쪽으로 펼쳐지게 된다.’

경기 과천과 서울 남부를 지나는 양재천은 강남권 개발이라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한때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죽음의 하천’으로 곤욕을 치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강으로 직접 흘러들던 양재천은 1970년대 개포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거치면서 탄천으로 합쳐지는 직선형 수로가 됐다. 하지만 양재천은 새로운 물길과 함께 죽음의 하천으로 변해갔다. 1995년 양재천의 생물학적 산소요구량(BOD)은 평균 15mg/l, 5급수의 수질이었다. 하천에 서식하는 어류가 한 마리도 없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했다. 양재천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자연형 하천 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복원 사업은 생물 서식처와 경관 등 하천의 모습을 본래 자연 상태에 가깝게 되돌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 결과 1995년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던 어류가 2001년에는 20여 종으로 늘어났고, 10종에 불과했던 조류도 42종으로 다양해졌다.

#변이 쿨데삭

1990년대부터 10여 년간 전국 평균 땅값 상승률을 기준으로 1년 사이에 땅값이 1억에서 2억으로 두 배가 된 유휴토지 또는 비업무용 토지는 3,875만 원의 토지 초과 이득세를 물어야 했다. 땅을 서둘러 개발하거나 처분하지 않는 한 세금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 의해 급격히 건축된 다세대 주택으로 형성된 양재동의 지형도는 여느 쿨데삭과 달리 도로가 순환하지 못하고 마치 미로처럼 막힌 구조를 가진다.

#양재동 텍사스

“양재에는 아파트보다 100평짜리 주택지가 많았어요. 주택도 없는 빈 땅에 근린 생활 시설만 자꾸자꾸 들어 서는 거예요. 거기 땅을 강남 사는 사람들이 꽤 샀을 텐데. 아직은 거기까지 이사 와서 집짓고 살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때 정부에서 세금을 물려요.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건물을 안 지으면 토지초과 이득세라고. 한두 번은 괜찮았는데, 매년 세금이 높아지고 그런 세금이 몇 년 쌓이니까 세금으로 낼 바엔 대충 작은 건물이라도 짓자고 해서 그렇게 우후죽순 상가 건물이 들어선 데가 지금의 양재동이에요. 근린 시설만 모인 참 이상한 동네라고 해서 ‘양재동 텍사스’라고 부르곤 했어요.”

#양재287.3

건축가 조성룡이 1991년 설계한 양재동 287.3은 준공 이후 2006년까지 조성룡 도시건축(UBAC) 사무실이자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 서울건축학교(SA)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렘 콜하스(OMA)와 가즈요 세즈마(SANAA)가 서울을 방문했을 당시 이곳에서 강연했다.

#후유증

서울시는 집단 이주 정책을 통해 무허가 정착지의 철거민을 비주거용 시 외곽 유휴 국공유지에 이주시켰다. 기존 무허가 정착지가 있던 지역이 도심지로 개발되면서 철거민들을 이주시킬 공간이 필요했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시 외곽의 빈 땅으로 이주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계획적으로 조성된 이주지로 거처를 옮겼음에도 해당 이주지의 재개발로 다시 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 세입자로 있던 철거민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다. 재개발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따라 무허가 정착지가 도심에서 떨어진 시 외곽으로 축출(displacement or evictions)된 것이다(M. Huchzermeyer, 2006). 강남 일대에 형성된 무허가 정착지들 중 일부는 이처럼 개발로 시의 경계나 외곽으로 밀려나 형성된 경우다. 현재 강남구 개포동은 과거에 변두리 지역이었다. 기존 지역의 개발로 이곳으로 밀려난 빈민들이 무허가 정착지를 형성한 것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이 지금의 ‘구룡마을’이다.

멤버: 강남버그

© 이강혁
  • 이정우는 영상 작가로 무대 미술을 전공하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영화 미술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10년 독일로 이주해 비디오 아트 디플롬, 마이스터 슐러 과정을 마쳤다. 2017년 귀국해 활동 중이며 주로 현대 사회의 주요 시스템의 오작동에 주목하며 이를 비판적인 조형 언어로 제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 박재영은 학부 시절 그래픽 디자인 사무실과 예체능계 전문 사회 탐구 학원을 운영한 바 있으며, 그 외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간 군상을 관찰했다. 주로 소설과 같은 스토리에 기반한 공간 설치 작업을 진행했으며, 인간 군상의 인식체계, 집단 무의식, 인지심리학, 뇌과학, 가상현실 등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파인 아트와 디자인 영역의 경계에서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 김나연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영상매체예술학과를 졸업했으며, 2인전 우연한 만남을 이용한 소탕 가능성(미스테이크 갤러리, 2018)에 참여했다. 수원문화재단 미술프로젝트 쌀의 독백: 일시적 식구의 코디네이터, grds의 아트 프로젝트팀 ‘project diglet’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경택은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공간사’를 거쳐 2014년 건축설계 사무소 ‘베이스먼트 베이스’를 개소했다. 설계한 주택 ‘MOTHER’가 중구 필동에 있다. 또한 서울이라는 도시가 갖는 복잡성과 사회성에 주목하고 이 결과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보였다. 2013년부터 김수근문화재단의 일원으로 건축가 김수근에 관한 자료 수집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의 도쿄대학교 석사 논문 주제이기도 한 올림픽 시설과 마스터 플랜을 기반으로 잠실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비평: 전시 콘텐츠로서의 강남

부동산 용어, 주거 환경, 라이프스타일 등을 미술계에서 주제나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독립 출판 서점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 판매하던 작은 독립 출판물 때문이었다. 예술가 이은우(1982~)의 아티스트북 300,000,000 KRW(2010)이 바로 그것으로, 여기에는 부동산 정보 사이트 다음 부동산에 등록된 전국의 아파트 중 2010년 9월 기준 매도 호가 3억 원의 아파트 1,167채의 평면도가 실려 있었다. 투명 비닐 봉투에 인쇄된 커다란 숫자 3과 8개의 0, 그리고 내지에 담담하게 정렬된 아파트 평면들은 무표정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무수한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2000년대 초까지도 예술계에서 비판의 대상이기만 했던 부동산, 특히 아파트는 2010년대에 시작된 새로운 출판 활동을 통해 비로소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후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박해천(1971~)의 콘크리트 유토피아(2011)와 이인규(1982~)의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2013~6)를 기준 삼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아파트를 중심으로 우리의 역사, 사회, 문화를 바라보기 위해 초고해상도의 외부자적 시선을 취했다면, 후자는 삶의 터전이자 고향인 아파트를 추억하기 위해 사진과 에세이의 병치를 통한 저해상도의 낭만적 시선을 취했다.

아파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플란다스의 개(2000), 주먹이 운다(2005) 등과 같은 영화를 시작으로 2010년 이후부터는 아파트 서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들도 창작의 소재로 자연스럽게 호출됐다. 특히 강남은 도시 개발의 상징적 지역으로서 영화 강남 1970(2015)에서는 주 소재로 다뤄졌다. 심지어 안남시라는 가상의 지역을 설정하고 그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을 짓기 위한 도시 재개발이 주요 갈등의 축이 되는 아수라(2016) 같은 영화까지 나타났을 정도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시선에 비견될 만한 ‘안녕, 은마아파트’와 같은 출판물이나 전시가 지난 10년간 나오지 않았는가?” 등의 질문을 해 볼 수 있게 됐다. 적지 않은 수의 창작자들이 강남, 아파트라는 해시태그를 예술, 전시, 출판 콘텐츠로서 언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에 선정된 ‘강남버그’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강남’이라는 지역을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콘텐츠로서 다루려고 했다. ‘강남버그’라는 이름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버그이자 일종의 마취된 도시로 강남을 설정했고, 이런 버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을 수술의 집도의이자 창조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존재에 비유했다. 그들은 강남에 대한 일반적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리서치 등의 다양한 활동을 계획했다.

미술가, 건축가, 기획자 등의 경력을 지닌 강남 8학군 출신의 이정우(1981~), 박재영(1981~), 이경택(1981~), 김나연(1992~)은 강남버그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워크숍, 버스 투어, 영상 제작, 공실 상가에서의 전시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냄과 동시에 강남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보여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각종 이슈로 인해 그들의 작업은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전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강남버그의 작품 계획안에는 강남이라는 지역을 통째로 아우르는 인프라스트럭처를 활용한 공간 활용 다이어그램이 포함돼 있지만 사실 그 어떤 계획도 확정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정 공간이나 방법론에 따른 연출, 제작이 강남버그의 목적은 아니었기에 4인의 독립된 시선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전시 콘텐츠와 이벤트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재배열됐다. 이 모든 것은 강남버그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마치 실제 강남을 둘러싼 무맥락적, 무절제적 개발 상황의 재현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간 강남에 대해 이야기했던 우리의 모습은 수업 시간 중 교사 몰래 낙서를 끄적거릴 때는 편안하고 재미있게 그렸지만 입시 미술 시험장의 석고상 앞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주눅들거나 긴장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미대 입시생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남버그는 천하제일 뎃생대회라는 이름 아래 일견 강남과도 버그와도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또한 일세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점차 사라져 가는―입시 미술의 한 양식을 자조적 유머처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로비로 불러냈다.

이 이벤트는 강남버그의 누군가가 강남의 입시 미술학원에서 석고 소묘를 준비했던 경험으로부터 연유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강남버그는 이를 통해 모든 것에 입시가 붙는 순간 우스워지는 현실을 풍자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벤트 참가자나 전시 관람객 대다수는 그런 의도보다 뜬금없음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내게는 과거 강남에서의 추억을 환기해 주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나 또한―송파구에서 초중고를 다니기는 했지만―대치동의 학원가와 선릉역의 화실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강남버그와 동일한 지역, 동일한 시간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입시 미술 경험자에게 강남에서 석고 소묘를, 석고 소묘에서 강남을 떠올리기란 꽤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누군가에게는 맥락 없는 이벤트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맥락상 타당한 조합의 이벤트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관람객에게 전시장의 중심을 맡고 있는 강남 건축 관련 시각 자료가 데생 대회보다 강남버그에 어울리는 진중한 소재로 다가올 것이다. 아파트, 성형 미용, 교육 등 강남을 둘러싼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은 고풍스러운 석고상을 따라 그리려는 이들의 열망으로 가득찬 영상으로 번역되며 주변부에 놓여 있는 데 반해, 도면과 모형 자료들을 위시한 마취 강남은 강남버그의 중심부에 놓여 전시의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남 거리 지도 위에 놓인 김수근(1931~86)의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1985)의 청사진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오엠에이(OMA)의 도곡 타워(1996) 렌더링 이미지, 입구 쪽 끝에 위치한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의 서울 코뮨 2026(2011)을 위한 모형들은 보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미지와 모형들은 우리가 어느 틈엔가 잊고 있던―국내외 유수 건축가들의 프로젝트의 무대라는―강남의 일면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마취강남 속 각각의 사물은 각각의 미래를 투사하는 것으로 읽힌다. 김수근의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은 한때 존재했으나 더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오엠에이의 도곡 타워는 결코 다가오지 못할 미래를, 서울 코뮨 2026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징하는 식으로 말이다.

강남버그가 보여주는 이 낯선 미래들과 나의 과거들은 이리저리 얽혀 있다. 미술대학 재학시절에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의 독특한 내외부를 촬영하기 위해 수차례 그곳을 방문했고, 건축 대학원 진학을 막연히 꿈꾸던 시기에는 서울 코뮨 2026을 비롯한 매스스터디스의 건축 작업에 대한 건축가 조민석(1966~)의 강연을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2019년에 만든 나의 사무실은 도곡타워 대신에 들어 선 건축가 조성룡(1944~)의 우성 캐릭터빌 단지의 유닛을 레노베이션한 것이다.

마취 강남의 이미지들은 낡고 잊혔던 미래다. 이것들은 강남에서 벌어졌던(그러나 벌어지지 않을) 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나와 다른 이들의 다양한 시선과 감정이 얽힌 장소와 순간이 존재하리라 기대하게 한다. 마취강남 주변을 둘러싼 멀티미디어 작업은 그런 기대의 일부를 나와는 다른 추억을 가진 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것이다. 딱히 정제된 형식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마취강남이 제시한 해시태그들에 의해 느슨하게 연동되는 연속적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 입구에 놓인 오르고또 오르면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드론의 시점을 통해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Global Business Center, HGBC) 착공 현장을 보여 준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오히려 더욱더 강하게 타오르는 강남 개발의 모습을―현재 진행형의 미래를―끊임없는 움직임 자체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 강남버스는 배우, 노래강사, 워킹맘 등의 가이드가 강남과 관련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벤트로 전시장에 부족한 감각을 덧씌우는 역할을 한다. 가이드와 그에 반응하는 관객의 표정, 목소리, 박수 소리 등 미디어 작품들은 마취 강남의 데이터를 보완한다.

일련의 활동은 강남버그 4인의 주관적 기억을 보관하는 데 집중한다. 강남이라는 카테고리를 전시하는 것에 심각함을 추구하지도 크게 무리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주관적으로 선택한 이벤트와 이미지가 아무런 해석 없이 놓이는 강남버그의 전시 형식은 전위적 전시 형식을 차용한 익숙한 전유로서 다가온다. 이를 시각 예술가의 완성도 높은 전시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강남버그의 전시는 그 빈자리만큼이나 다음을 위한 전시로서 많은 가능성을 일깨운다.

“도시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되며, 기념물을 통해서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며, 이런 기념물의 지속성과 영속성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념물의 의의, 역사, 예술, 존재성, 기억으로부터 나온 결과다.”라는 알도 로시(Aldo Rossi, 1931~97)의 말처럼 강남을 추억하는 작은 집단인 강남버그가 지적하고 기념비화한 버그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전시를 위한 콘텐츠가 된다. 강남버그의 콘텐츠 배열과 구성은 앞으로 그들과 유사한 의도와 구상을 지닌 기획자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남버그에 화답하듯 서울의 다양한 장소를 주제나 소재로 하는 전시가 앞으로 더욱 많아지리라 감히 예견해본다. 예술계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지역의 아파트 키드가 펼치는 예술 활동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을 주제나 소재로 한 작품과 전시가 증가할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안녕, 은마아파트”와 같은 사적이고 가벼운 사진집이나 에세이집이 나올 날은 결코 머지않은 미래일 것이다.

토크: 강남에 살든, 강남에 살지 않든

박지수 우선, ‘강남버그’라는 팀 이름에 관해서 묻고 싶어요. 멤버마다 ‘버그’에 대한 개념과 입장이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요, 각자 한 분씩 생각하는 바를 말씀해주세요.

김나연 저는 ‘버그’를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편이에요. 버그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죠. 다만, 버그 자체를 기능으로서 작용하도록 그냥 놔둘 수도 있고, 원했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리는 디버깅도 있어요. 예상치 못한 현상은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항상 발생하는 것들인데, 프로그래머들은 그 현상을 ‘버그’라고 지칭하죠. 이것과 저희가 강남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버그가 꼭 문제라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현상이 벌어지는 거잖아요. 같은 맥락에서 강남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난 현상들을 버그로 간주하고, 이에 관해서 묻고 답하는 과정이 강남버그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죠.

박재영 일반적으로 ‘버그’라면 흔히 잘못된 오류라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여요. 하지만 단순히 잘못된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멤버도 일종의 강남버그인 셈인데요. 잘 되라고 8학군인 강남에서 키웠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떤 창조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버그’라는 말도 바꿔 생각하면 꼭 고쳐야 무엇이 아니라 방향성이 고정되지 않은 다용성의 의미를 품었다고 봐요.

이정우 강남을 ‘버그’라고 했을 때, 이를 처리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땜빵 식으로 대처하는 ‘핵’, 시스템 자체를 다시 처음부터 검토하고 개선해나가는 ‘디버깅’이 있어요. 그런 개념을 차용해 지금 강남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슈, 즉 주택과 교육 문제에도 대입할 수도 있죠. 저는 강남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주로 해킹으로 간주했는데요, 다른 팀원들은 달랐을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들끼리 내부적으로도 긍정과 부정을 왔다갔다 조율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어요.

박지수 ‘강남버그’라는 팀명을 들었을 때, 꽤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을 예측했어요. 그러나 전시장에서 결과물을 봤을 때는 강남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긍정과 부정이 선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마치 ‘버그’에 긍정과 부정의 개념이 공존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흥미로웠고, 한편으로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이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이야기하고요,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죠. 모든 프로젝트가 강남에서 일어났던 현상들을 주목하잖아요. 각자 강남에서 주목하는 부분이나 관심사가 조금씩 달랐을 것 같아요.

이경택 저는 계속 강남의 도시 계획 프로젝트에서 의도치 않게 나타났던 현상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쿨데삭(Cul-de-sac, 주로 주택 단지 내에 설계되는 도로의 한 유형. 단지 내 도로의 끝을 막다른 길로 하고 끝에 자동차가 회차할 수 있는 공간을 주어 설계한 것.)이라든가 어긋난 그리드라든가 계획에서 벗어나거나 의도치 않은 것들을 ‘버그’라고 봤죠. 제가 다루고 싶었던 건 강남에서의 부동산 문제입니다. 소위 말해서, ‘강남불패’의 신화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 부동산 버블은 과연 언제 붕괴될까, 그런 궁금증들이죠. 부동산 문제가 결국 강남의 교육 문제라든가 도시 개발과 연결된다고 봤거든요.

이정우 저는 ‘강남과의 관계’에 집중했어요. 강남에 살든 살지 않든, 강남에 살기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는 계속 강남에 영향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강남이 대한민국의 표준이나 기준처럼 적용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대한민국의 부동산도 강남의 기점으로 가까운 순서대로 오르는 현상을 봐도, 단순히 강남에 살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죠. 교육열의 문제도 솔직히 강남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목동이나 중랑, 분당도 마찬가지죠. 사교육이 거대한 산업이 되고 가계마다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불행한 건 단지 강남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단순히 강남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남을 통해서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가시화하는 게 강남버그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영 저는 지역적인 특징이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강남에 주목하는 것보다, 일종의 버그를 계속 만들어내는 행위들에 관심 있어요. 저희가 처음에 계획했던 미술학원에서 석고 데생을 그리거나 강남을 순환하는 버스를 운영하는 등의 일들이 기존의 전시 공간이나 미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강남이라는 사이트를 그냥 테스트 베드처럼 두고 그곳에서 여러 방식의 창작 행위를 행하는 것에 더 주목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강남의 문제와 별개로 계속 ‘이상한 짓을 하자’고 이야기했죠.

박지수 어찌보면 ‘강남’파와 ‘버그’파가 나눠지는군요. 강남을 작업의 대상과 무대로 삼고, 그 문제를 말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작업 방식에서 기존과 다른 해킹과 버그를 일으킬 수 있는지 고민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박지수 그럼,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전시작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죠. 영상 작업 오르고 또 오르면은 3채널로 구성됐고, 각각 시점이 다르잖아요. 어떤 이야기와 의도를 담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이정우 3채널 중에서 하나는 드론의 시선이고요, 다른 하나는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나머지 하나는 드론에서 전송된 장면을 화면 캡처한 거예요. 기본적인 설정은 강남에 2026년 완공될 105층 건물의 높이를 드론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는 거였어요. 그 건물과 높이가 단순히 부동산의 문제뿐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구축하는 강남의 모습을 환기하죠. 완공되면 569미터인데, 그 높이를 드론으로 점유하면서 불법 해킹을 한다고 생각했고, 촬영 과정 중에서 일종의 버그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 작업했어요. 기무사에 촬영 허가를 받긴 했지만, 감독관이 나오면 뭔가 실랑이나 해프닝이 벌어지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촬영 당일에 다 찍으면 알려달라고만 연락 와서 김이 빠졌어요. 그런데 버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겼는데, 드론이 그 높이까지 못 올라가는 거예요. 아마도 변전소의 강한 전력 때문에 신호가 교란되는 듯했어요. 드론의 신호가 자꾸 끊겨서 가다가 다시 돌아오고, 드론에서 전송된 화면도 잘 안 잡혔죠. 롯데타워도 마찬가지고, 왜 이렇게 높은 건물을 짓고 싶을까, 그 건물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고 그 근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생각과 연결해 이카루스 이야기를 삽입했고요.

박지수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보자면 전시작 중에서 오르고 또 오르면마취 강남이 도시의 구축 과정과 구조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것 같아요. 물론 오르고 또 오르면은 문학적이고, 마취 강남이 보다 분석적이라 두 작업의 톤앤매너는 다르지만요. 또 한편으로는 강남버스천하제일 뎃생대회가 참여형 프로젝트로 참여자들의 이야기가 보여진다는 점에서 묶이더군요.

이정우 마취 강남에서 건축물을 중심으로 강남의 도시 개발을 전면적으로 보여줘요. 강남버스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역 이야기가 펼쳐지죠. 두 작업의 동선과 장소가 거의 겹쳐요. 또 마취 강남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강남의 도시 구조를 추적한다면, 오르고 또 오르면은 완공 예정인 건물의 높이를 통해서 강남의 미래를 가늠하죠. 전시장에서는 마취 강남을 중심을 잡고, 오르고 또 오르면강남 버스가 둘러싼 모습으로, 또 국립현대미술관 안에서 진행한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전시장 바깥쪽으로 뺐어요.

이경택 마취강남 중에서 영동대로 뷰를 전시장 벽 쪽에 붙였는데, 수직적인 뷰와 수평적인 뷰가 겹쳐서 보였으면 했어요. 이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은 ‘르네상스 호텔’의 도면이 처음 공개된 점이죠. 설계자인 김수근 건축가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해 몇 차례 전시에서 공개된 적이 있는데요, 이 호텔의 설계도는 한 번도 전시된 적이 없어요. 2017년에 ‘르네상스 호텔’을 철거할 때 발견된 캐비넷에 있었죠. 건축가의 명성이나 건물의 완성도를 떠나 강남 개발의 과거를 추적하는 데 필요한 자료예요. 전시를 열고 나서 마취 강남에 포함된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왜 이런 건물이 포함됐지, 이게 무슨 건축이야, 그런 반응을 확인했거든요. 그런데 개별 건축물의 정체성이나 디자인보다 ‘강남’이라는 도시적인 맥락 안에서 어떤 건물이 생겨나고 사라졌는지 큰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단순히 건축물 아카이브를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맥락과 사회적인 흐름 안에서 건축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그런 화두를 담은 거죠.

박지수 마취 강남에서 두 가지 점을 흥미롭게 봤어요. 첫째, 과거에 있었던 건물과 실현되지 못하고 계획으로 그친 설계도 이미지들로 구성돼 현재성이 제거됐다는 점. 둘째, 이를 내과와 외과 등 의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한다는 점이죠. 이런 식으로 구상한 의도는 무엇인가요?

이경택 이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렘 쿨하스를 향한 오마주를 담고 있어요. 그는 광기의 뉴욕: 맨해튼에 대한 소급적 선언서를 통해 도시에서의 인간의 삶과 건축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분석했죠. 그런 시선과 태도로 강남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강남에 대한 사적인 기억과 추억을 최대한 배제했죠. 그런 가운데 도시 계획을 외과 수술과 내과 치료에 빗댔던 르 코르뷔지에의 시선을 차용해 강남의 도시 구조를 분석해 봤어요. 풍선확장술, 이식과 거부반응, 후유증 등 외과수술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들은 도시 개발 과정과 닮아있죠. 여기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는 기억상실에 비유할 수 있고요. 끊임없이 벌어지는 도시 개발은 많은 기억상실을 수반하기 때문이죠. 사회현상으로서의 도시 개발, 이를 외과 수술에 빗대 용어와 관점 등을 통해 담론을 촉발시키고 싶었어요.

박지수 그러면 이 작품에 포함된 아카이브 이미지와 자료를 선택할 때 고려한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이경택 주로 대형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골랐어요. 은마아파트 단지, 타워팰리스 단지, 영동대로 프로젝트 등은 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규모죠. 강남구에 집중되는 것 또한 매우 특이한 현상이고요. 그런 대형 프로젝트는 개인의 의지로는 불가능하잖아요.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깔려 있고, 다양한 정관계 인사들이 연루돼 있죠. 단순히 중요한 건축물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복잡한 맥락을 짚어보고 싶었어요.

박재영 그 이미지들이나 자료들은 대부분 현실에 없는 거였어요. 건축되지 못하고 설계도와 조감도로만 존재하는 건물을 보면서 저게 완성됐으면 어땠을까, 가상의 도시를 상상하게 되더군요.

박지수 사진과 설계 도로만 제시되는 마취 강남, 그리고 완공 예정인 105층 건물 높이를 담고 있는 오르고 또 오르면을 함께 보면 모두 현실에 실물이 존재하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워요. 이를 통해 강남의 현재를 조망한다는 점도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 연결된 장면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강남을 직접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105층 건물이 들어선다고? 그럼 얼마나 높을까? 직접 봐야겠어’ 그런 식으로 말이죠. 이런 태도는 기존에 ‘강남’이라는 텍스트를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차별된다고 생각해요. 이와 관련해서 강남을 작업으로 다룰 때, 어떤 식의 태도를 보이겠다는 구상이나 논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재영 각자 생각이 다를 거예요. 무엇보다 강남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죠. 저는 여기를 버드뷰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여기에 살고 있는데, 버드뷰는 아무래도 외부자적인 시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집도 강남이고, 출근하면 또 강남인데, 그렇게 일상인데, 여기를 의식적으로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박지수 그것 자체로 어쩌면 대상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박재영 그렇죠. 저는 숲속에 살고 있는데, 누군가 숲 바깥에서만 보고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강남에 실제로 오면 모든 곳이 부자가 사는 동네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강남은 부자 동네, 강남 사람들은 부자, 그런 거야말로 외부적인 시선이죠. 부동산과 임대료가 높을 뿐이지 사는 건 비슷하고요. 여기도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정주 공간이니까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을 마치 엄청난 특권 계층처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제게는 일종의 판옵티콘에서 바라보는 시선 같아 불편해요. 계속 강남에 살았던 저와 달리, 이정우 작가는 유학도 다녀오고 강남이 아닌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버드뷰적인 시선도 가진 것 같아요. 멤버마다 강남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다르고, 또 다른 멤버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 거리가 왔다갔다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정우 저는 강남에서 태어나 자랐고 유학을 갔는데, 그때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떴을 시기예요. 외국인들은 마치 강남을 싸이의 뮤직비디오처럼 신나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물론 강남에 오락적인 요소가 많긴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맥락이 뒤섞인 도시잖아요. 귀국 후에는 강남에 살지 않게 되면서 점점 거리가 생겼고, 박재영 작가가 말한 것처럼 외부자적인 시선을 동시에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어쩌면 대상화하는 면도 없진 않겠지만, 그 덕분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봐요.

박지수 스스로를 ‘강남버그’라고 간주하지만, 각자 강남과의 거리와 태도는 다르군요. 그건 당사자성의 문제와도 연결될 것 같은데요. 가령, 박재영 작가가 계속 강남에서 생활하면서 당사자성이 강한 반면, 강남 출신이 아닌 김나연 작가는 당사자성이 약할 것 같아요. 이정우, 이경택 작가는 강남 출신이지만,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문제를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중간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근데 이렇게 거리나 당사자성이 각자 다르면, 작업 과정에서 충돌이나 갈등이 있지 않나요?

김나연 강남버그가 말하는 이야기가 단순히 강남 출신, 직접적인 당사자 또는 내부자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강남 주변에 있는 사람들, 밖에 있지만 강남에 진입하고 싶은 사람들, 안에서 밖으로 밀려나간 사람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남의 모습과 이야기가 뒤섞여 있는 게 우리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요. 작업 과정에서 제가 강남 출신이 아니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나와 많이 다르다는 걸 확인하면서, 그 이유가 어디에서 비롯될까 생각해봤어요. 프로젝트에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으려고 했던 건 그 때문일 거예요. 참여하고 체험하는 프로젝트가 많았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죠.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생각들이 더해지기를 바랐어요.

이정우 그런 지점에서 가장 아쉬운 프로젝트는 강남버스였던 것 같아요. 원래 의도는 강남을 순환하는 버스로 투어 상품을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참여자들이 강남에 관한 이야기를 채우는 거였죠. 코로나 때문에 참여자를 모집하는 것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제약이 생기고 말았어요.

김나연 원래는 투어를 세 차례 정도 하면서 참여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수집하려고 했었죠. 참여자도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미술과 관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등 여러 카테고리로 승객을 모집하려고 했는데요, 그게 다 무산되면서 운행도 1회로 줄고, 관객을 저희가 섭외해서 이야기를 채워야 했어요.

박지수 전시작의 구성을 보면 다양한 시간대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강남버스는 강남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현재’와 연결된다고 느껴지고, 마취 강남오르고 또 오르면은 앞서 말했듯이 과거와 미래와 연결되는 느낌이 들죠 . 그런 측면에서 강남버스는 강남의 현재와 링크하기 위해 참여자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작가는 뒤로 물러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박재영 더 물러날 수 있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덜 물러난 느낌이에요.

박지수 천하제일 뎃생대회이야기도 해볼까요. 일반적으로 입시를 위한 석고 데생은 비판 지점이 많잖아요. 그럼에도 ‘뎃생대회’라는 이벤트를 통해 석고 데생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 프로젝트는 멤버들이 과거에 석고 데생을 했던 경험이 모티브라고 아는데, 각자 어떤 기억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박재영 팀원 중에는 입시 미술을 위해 석고 데생에 매진했던 사람도 있고,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해봤지만 실력은 늘지 않았던 경우도 있고, 이번에 처음 그려본 경우도 있고요. 특이하게도 이런 조합은 참여자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저희는 왕년에 석고 데생 좀 해봤던 고수들이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말이죠.

김나연 저는 세대가 다르고, 다른 종류의 입시를 해서 석고 데생은 미술학원에서 전설처럼 접했어요. 어느 미술 학원에나 잘 그린 석고 데생 하나쯤은 붙어 있잖아요.

이정우 저는 아버지께서 체육학원과 미술학원 중에 하나 고르라고 해서, 미대에 가보겠다고 고3 때 뒤늦게 석고 데생을 시작했어요. 근데 미술학원 강사인 누나에게 매일 검사를 받아야 해서 단시간에 많이 그렸죠. 원래 데생을 통해서 관찰력과 그림 실력을 키울 수 있는데, 입시의 수단이 되면서부터 기계처럼 외워서 그리게 돼죠. 수단과 목적이 전복된 상태라는 점을 착안했고, 무협지에 등장하는 ‘천하제일대회’처럼 각자의 기예를 뽐내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박지수 말씀하셨듯이 공식처럼 외워서 그리잖아요. 그래서 입시 날 자리싸움이 치열하기도 하고요. 또 결과물은 체육관에 쭉 펼쳐놓고 기계적으로 평가하죠. 한편으로는 외국에서는 왜 동양인들이 서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리는지 의아해하더군요. 이래저래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봐요. 그럼에도 천하제일 뎃생대회는 비판보다는 참여자들의 즐거움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게 돼요.

박재영 저희 이모가 피아노 학원을 했는데, 피아노를 무척 잘 치는 아이가 있었어요. 주변에서 예중, 예고를 보내라고 할 정도였죠. 그런데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바로 피아노를 그만두었대요. 피아노를 다시는 안 친다고 하더군요. 미술도 이와 마찬가지로,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행위였을 때는 무척 즐거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트레스가 되죠. 게다가 우리나라는 뭐든지 즐거움보다는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으 로 삼잖아요 . 천하제일 뎃생대회를 진행할 때도 보니 역시 참여자들이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런데 놀랐던 점은 무척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예요. 실력과 상관없이요. 입시로 시작해 실력이 늘지 않아서 대학에 계속 떨어졌던 제게 석고 데생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는데 말이죠. 저희가 원래 참가자들의 순위를 정하고 상품도 줘서 일종의 경쟁 구도를 만들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막판에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본래의 즐거움과 다른 요소가 개입되면 변질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천하제일 뎃생대회를 진행하면서 석고 데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박지수 그렇다면, 직접 비판하는 대신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면서 우회적으로 입시 제도의 폐단을 환기한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이정우 그런데, 석고 데생을 꼭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폐단이 있긴 하지만, 석고 데생을 통해 표현력을 키울 수 있거든요.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 보고 그대로 그리는 기술이 예전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무언가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게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거든요. 석고 데생했던 세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걸 스케치로 옮길 수 있어요.

김나연 석고 데생이 입시의 수단이 되면서 획일화된 측면이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석고 데생을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 주장도 획일적인 생각이라고 봐요. 입시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획일화된 기준과 평가만 아니라면 분명 즐거움과 장점이 있다는 걸 이번에 확인한 것 같아요.

박지수 강남버스천하제일 뎃생대회처럼 참여형 프로젝트에는 변수가 많잖아요. 결과물의 의미가 간혹 참여자들의 간단한 소감 정도로 납작해지는 경우도 있고요. 아무리 비판적인 의도를 포함해도 ‘재밌었다, 좋았다’는 식의 참여자의 반응으로 요약되니까요. 그럼에도 참여형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라 제약이 많았잖아요.

이정우 참여형 프로젝트는 해킹이나 버그처럼 어떤 균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어요. 코로나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그럼에도 참여형을 고집한 것은 그동안 해왔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각자 개인 작업을 했던 방식에도 균열이 필요했는데요, 그동안 해왔던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굳이 팀으로 프로젝트를 할 이유도 없다고 봐요.

박재영 기존의 미술 관련 행위들, 특히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방식에서 벗어났으면 했어요. 보통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포함시켜 무거운 이야기를 진중하게 던지는 방식이 많잖아요. 일단, 조금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참여자들이 와서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모이는 방식처럼 말이죠. 거기에 거시적인 안목을 부여할 수는 없잖아요.

김나연 저는 강남에 대한 제 생각과 느낌보다 오히려 강남 중심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어요. 그래서 참여형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요. 그리고 참여자들이 프로젝트 과정 속에서 던지는 말이나 질문들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박지수 서두에 제가 작업에서 긍정과 부정이 선명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고 했잖아요. 물론 긍정과 부정을 딱 잘라서 선택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동안 예술 작업에서 강남의 문제를 제대로 비판한 적이 있을까,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좀 더 선명하게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거죠.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모호한 입장과 태도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해킹과 버그는 가능한 것인지 의문도 들어요. 강남버그의 프로젝트도 결과적으로 미술관에 안착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 부분은 강남버그만의 문제는 아니고, 지금 현재 미술 생태계와도 연관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요즘 왜 위험한 작업이 안 나오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요즘 환경에서 위험하거나 파격적인 작업이 나올 수 없겠다 싶거든요. 대부분의 작업자들이 전시를 하기 위해 공모전이나 기금을 신청하잖아요. 서류를 쓰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심사를 받는 프로세스에서 위험한 작업이 나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건 단지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 거죠. 그래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요.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강남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 첫 번째 질문, 이런 지금 환경에서 근본적으로 버그는 과연 가능한지에 관한 것이 두 번째고요.

이정우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하면, 강남버스에 아예 문장으로 “강남은 실패한 시스템의 산물”이라며 비판을 드러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뚜렷하지는 않은 건 사실이죠. 하지만 전시와 맞물려 시간상 일단락된 것일 뿐 프로젝트가 끝까지 진행되진 않았어요. 좀 더 진행됐다면 어떤 결과값을 도출하면서 달랐을 거예요. 아직 진행 중인 작업이라는 걸 감안하고 봐주세요. 두 번째, 버그가 가능할까, 그런 이야기는 우리끼리 자주 해요. 일단 외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생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자원을 확보해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만들고 책임질 수 있을 때가능한 것같아요. 작가들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야 외부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고 봐요. 지금은 기금을 받기 위해서 때로 작가들도 규격화된 폼안에서 창작물을 만들고, 자체 검열을 하기도 하잖아요.

박재영 저와 몇몇 동료들이 운영하는 공간인 ‘오시선’은 작은 규모지만, 3년째 공공기금을 신청하지 않고 운영하고 있어요.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수익을 바탕으로 가능한 예산 안에서 꾸려나가고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미술이 공공재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기금의 프로세스는 점점 복잡해지고, 작가가 기금을 받을 수 있는 시기나 횟수는 무척 제한적이죠. 결국 기금은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거라고 봐요. 그렇게라도 미술에 기금이 투여되는 것은 미술을 공공재로 보고, 그만큼 예술이 무언가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가 깔린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이게 환상이라고 봐요. 제가 만난 외국 작가들은 대부분 자기가 벌어서 하고 싶은 거를 하기 때문에 그런 환상에서 자유로워요. 그러려면 이정우 작가가 말했듯이 예술 콘텐츠의 주체가 이윤을 만드는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김나연 긍정이랑 부정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강남처럼 굉장히 복합적인 사회현상이라면 더욱 더 그렇고요. 강남은 여러 현상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거죠. 물론 한쪽으로 입장을 몰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일까 계속 의문이 들어요. 저는 앞서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버그를 현상으로 바라보고, 계획에 없던 것이 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를 꼭 긍정이냐 부정이냐 그런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봐요. 예술 작업도 마찬가지죠. 버그에 관해서 리서치하다가 흥미로웠던 대목이 있어요. 예전에는 버그가 발생하면 바로바로 고쳐달라는 요구가 생기고, 신속하게 처리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소비자이든 생산자이든 버그를 발견해도 그냥 넘어간다는 거예요. 실제로 버그의 발생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걸 알 만큼 버그에 익숙해진 거죠. 은연중에 버그를 프로그램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정우 버그를 일부러 즐기는 사람도 많아요. 가령, 아이폰에 iOS가 업데이트가 되면 베타 버전이 나오고 일반 사람들은 받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걸 굳이 찾아서 깔고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을 캡처해서 SNS에 올리죠.

김나연 예전에는 어떤 프로그램이든 미리 테스트해서 버그를 줄이는 과정을 꼭 거쳤는데, 이제는 달라졌어요. 베타 버전을 상용화로 풀고, 그 안에서 버그를 찾아서 즐기는 것이 하나의 기능처럼 작용하고 있죠.

이정우 예술 작업 또한 세상을 모방하고 세상에 영향을 받잖아요. 그런데 요즘 코로나처럼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예술 작업으로 버그를 만들 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네요. 사실 예전에 매체와 플랫폼 등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어떤 예술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세상을 선두하고 무언가를 예측할 수 있었던 지점이 있었다고 봐요.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런 사이클을 훌쩍 뛰어넘고 있죠. 그런 측면에서 예술가는 세상에 무언가 새로운 걸 내놓는 존재기보다는 세상이 흘린 잔여물이나 흔적을 뒤적거리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버그는 예술가뿐 아니라 특정 인물이 주체가 돼 만들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김나연 작가의 말처럼 현상처럼만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서울퀴어콜렉티브
Seoul Queer Collective

소개: 서울퀴어콜렉티브

서울퀴어콜렉티브“서울퀴어콜렉티브는 네트워크 연구 그룹이다. 각자의 일상을 살며 느꼈던 도시의 문제들을 어느 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하는 일, 성격, 가치관이 모두 다르다 보니 이 그룹의 정체성도 한 줄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SQC는 같은 점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서울 지도에 수많은 점을 찍어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첫 번째 프로젝트를 통해 종로3가에 몇 개의 점을 찍었다. 이 점에서 생각이 출발하기도 했고 도착하기도 했다. 명료하지 않은 설명이지만 분명한 점은 SQC의 프로젝트는 정답이 없고 오히려 도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가끔 모였다 흩어지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남수정, 종로3가로 가는 길,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는 종로3가의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결성된 연구 그룹이다. 최근 몇 년간, 서울시의 도시 재생 정책에 따라 종로 일대는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예컨대 익선동 주변은 젊은 인구들의 유입이 늘어나고 새로운 가게들이 생겨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종로3가에서 일상을 영위해온 노숙인, 성소수자, 탑골 공원 노인과 쪽방촌 주민들은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또는 해결해야 할 도시 문제로 낙인이 찍혀 밀려난다. 소비력이 없고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존재로 타자화되는 것이다.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종로3가로 대변되는 도시의 문제를 소수자의 입장“여성은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집을 잃기 전에 이미 홈리스 상태를 경험한다. 남성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화된 역할을 잃었을 때, ‘실직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홈리스가 된다면, 여성은 정상화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어머니’나 ‘아내’라는 이름으로 홈리스 상태에 놓인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잘 살아가던 여성도 결혼해서 살다 보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됐음을 발견한다. 여성에게 결혼은 ‘사회적 자원’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되기 쉽다. 가정폭력이나 다른 이유로 이혼을 선택한다면, 전업주부인 여성은 ‘자발적으로’ 실직과 빈곤을 선택하는 셈이다. ‘홈리스-되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소외화-타자화의 과정이다. 남성 홈리스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경제적 소외화’를 경험할 뿐이지만, 여성 홈리스는 생애 전반에 걸쳐 ‘경제적 소외화’와 ‘성적 타자화’를 각각 또는 동시에 경험한다. 집 현관에 남자 신발을 놓아두는 혼자 사는 여성을 생각해 보라. 자신의 집에 살고 있더라도 침입의 불안을 느낀다면, ‘성적 타자화’로 인한 홈리스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을 당하고도 경제적 불안 때문에 이혼을 망설이게 된다면, ‘경제적 소외화’와 ‘성적 타자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다. 남성들을 피해 공중화장실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밤을 지새우는 여성이나 먹고살기 위해 성 판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강민수, 여성은 어떻게 홈리스가 되는가,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에서 접근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결성됐지만, 팀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방법론에 있어서는 열려 있다. 이번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에서는 출판물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이 책은 서울퀴어콜렉티브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던지는 질문, 즉 “도시의 특정 공간을 어떻게 정당하고 온전하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유효한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종로3가를 걷다 보면 다양한 공간과 삶을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된다. 책은 종로3가를 새롭게 해석한 시각 자료들과 이 공간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 보행의 체험을 재현하고 기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 © 송유섭와 네 차례의 세미나SQC는 모두 네 차례의 세미나를 진행한다. 첫 번째 세미나 도시기록과 사회참여(2019년 11월 22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에서는 도시를 기록한다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대화로 프로젝트의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세미나 퀴어-공간, 기록하기?!?(서울시 청년허브, 2019년 12월 1일)에서는 서울에 존재하는 성소수자의 공간과 그들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젠더 퀴어 당사자들은 파편화됐던 개별 담론의 틈에서 그동안 다뤄지지 못한 퀴어 공간의 존재와 공간성을 직접 발화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세미나 걷기-말하기-듣기(SQC 유튜브 채널 생중계, 2020년 5월 23일)에서는 서울의 특정 공간을 살아온 개인들의 경험과 역사에 대해 구술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세미나 서울 다시 짓기(2020년 9월 동안, SQC 유튜브 게시)에서는 도시 퀴어의 일상을 포용하는 도시 공동체 건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그리고 두 개의 참여형 웹페이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운드 설치 작업 평평하게 겹쳐진[방문] (프로그래밍 및 디자인: 김규호), 지층의 목소리 등을 소개했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는 수많은 요소들이 동원된다. 지역의 역사와 건물들의 모습,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과 차들이 다니는 속도, 거리 간판의 디자인과 상인들의 말투 등이 모두 어떤 지역의 모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종로3가’“최근 수 년 동안 익선동은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로 부상했다. 도심 속 작은 한옥 마을의 정취에 청년들은 매료됐다. 미디어에 활발하게 소개됐고 한옥 단지가 전부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수많은 옷가게와 유명 맛집의 체인점까지 입점했다. 익선동에는 낡음 속에서 느끼는 환상적인 세련됨이 있고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을 찾아들어가는 보행의 재미가 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하철역 5호선 종로3가역 출입구로 가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종로3가 지하철역은 3개 선이 연결되어 있고 환승 통로가 복잡하다. 그래서 1호선과 3호선을 타고 온 사람들은 출구로 나와 걷는 편이 더 편하다. 종로 대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에도 큰 블록을 걸어 들어와야 한다. 익선동의 구역 내부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므로 익선동은 더욱 보행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걷기의 즐거움. 항상 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작은 도시의 일상을 감상하는 즐거움. 마치 놀이공원에 입장하듯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구역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독특한 풍경이 바로 익선동의 매력이다. 그러나 이 즐거운 걷기가 종로3가의 그림자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반대로 종로3가의 그림자를 드러내기 위해 ‘즐거운 걷기’를 유도한 것이기도 하다. 종로대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을 수 있는 길의 여러 갈래를 우선 설명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길은 탑골공원 담장을 끼고 낙원상가를 향한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 우리는 70대 이상 할아버지들의 거대한 무리를 발견한다. 두 번째 길은 일명 ‘송해길’이다. 역시 오래된 기원과 이발소, 낡은 국밥집 등과 함께 할아버지들을 마주친다. 세 번째 길은 지하철역 3호선의 출입구가 있는 길이다. 이 길의 안쪽에 피카디리 CGV가 있지만, 그 골목을 걷다 왼편을 바라보면 쉽게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은 풍경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큰 낙원동 블록을 지나 익선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낯섦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다. 특히 금요일과 토요일 밤, 해가 지면 말이다. 익선동으로 들어가기까지 보행자를 보는 시선과 보행자의 풍경을 향한 시선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 바로 종로3가의 타자성에 대한 의구심을 촉발하는 계기이다.” —남수정, 타자들의 공간 종로3가라는 구체적인 지역을 프로젝트 주제로 삼는 순간,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역사가 켜켜이 축적된, 이 복합적으로 복잡한 지역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전시 개막과 동시에 출간된 책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는 종로3가를 구성하는 개인과 공간의 경험들을 온전하게 전달하려는 진지하고 섬세한 노력의 결실이다. 연구자들의 원고와 통계 자료, 그리고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며 종로3가와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된 이 책은 도시 공간을 개인적 경험의 총체로서 파악해보려는 시도로서 유의미하다. 책에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공간, 길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공간, 알고 보면 특정인에게는 달리 보이는 공간들이 등장한다.

김영준, 서울의 퀴어를 찾아서

김영준 그러니까 흔히 한줌 팔로워라고 하지만 한줌이어도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기도 하고 해서. 예를 들면 말씀드린 것처럼 건축만 보고 팔로를 했는데 제가 올리는 퀴어 이슈를 보고 이런 이슈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하신 분들도 계셨고, 그 반대 분들도 계셨고. 그런 반응 자체가 저는 아주 즐겁더라고요. 또 트위터하는 사람들이 여러 계층이긴 하지만 저도 제가 맞팔이라든가 자주 교류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대학 와서 공부도 하고 이런 활동도 하시고 아니면 각자 전공 분야에서 좀 명망도 있으신 분들이 많다 보니까 결국 인플루언서라 할 수 있는 고학력 집단인 거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이슈들이, 긍정적인 이슈들이 퍼져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그런 희망 때문에라도 조금 의무감으로 올려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SQC 말씀하신 것처럼 하면, 한줌의 팔로워를 가지고 계시는데 6월 되면 갑자기 퀴어 얘기하고, 페미니즘 얘기도 하고. 평소에는 건물 얘기나 맨홀 얘기를 하시고, 또 철도 얘기도 많이 하시고. 꽤 다양한 분야를 말씀하시는데, 트위터에서, 여기에서 데리고 온 사람을 저기로 데리고 가고, 저기에서 데리고 온 사람을 여기로 데리고 오고. 이런 점이 흥미로웠어요.

김영준 건축이나 도시나 퀴어는 제 개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는데 페미니즘은 제 개인적 경험인지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퀴어 당사자면서도 페미니즘 차별하는 사람 많잖아요? 당사자성이 좀 더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원동력은 되지만 반드시 당사자일 필요는 없다는 걸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 가지면서 느꼈어요. 예를 들면 저는 남자로 살아갈 건데 물론 소수자로서 차별이나 공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는 있지만 여성 차별의 당사자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럼에도 자꾸 관심이 가고. 여군 차별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고 그런 것들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그냥 제가 관심이 가요. 관심을 일부러 갖는 것도 있고요. 당사자성이 필수, 당사자성이 있으면 좋지만 그러니까 필요조건은 아니란 생각을 계속 갖고 있어요. 물론 당사자성이 있으면 더 절실하고 더 관심을 갖게 되겠지만요. (…) 기록 얘기가 나와 든 생각인데 서로 관계가 느슨한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연대할 때 아웃풋이 가장 좋은 거 같아요. 느슨한 시민, 물론 제가 이제 이걸 취미로 시작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는 과정에서 트위터를 하려는 이유가 느슨한 오타쿠 또는 마니아들의 주체적 연대가 가능한 곳이 트위터 계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제가 트위터를 시작한 지 올해 딱 10년인데 다시 10년이 지나면 많은 게 쌓이지 않을까 합니다.

강예린, 소수자의 도시 공간, 도시 점유

SQC 도로의 일정 시간을 포차가 점유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예린 좋죠. 그게 너무 좋은 게, 퀴어 축제를 어느 스페이스에만 한정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차로를 점유하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차가 점유하는 공간들을 사람이 보행하면서 봤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그리고 내가 이 도시의 주인공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쨌든 한국은 1960년대 정확히 얘기하면 한 1960년대 말 이후에는 자동차에 모든 걸 다 내준 도시이기 때문에, 보행도시 하나 없는 나라가 되었죠. 도로 한복판에서 볼 때 느낌이 색다르잖아요. 한국은 광장 문화도 없잖아요. 왜냐하면 광장은 한국이랑 전혀 다른 질서의 공간이거든요. 지금 만들어지니까 광장이라고 치는 거지 사실 광장은 전무후무한, 도시 계획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역사가 없다 보니까, 길 위에서 얘기하는 것들이 더 중요했고 그러다 보니 그 길에 대한 기억들이 해방구에 대한 기억들이랑 비슷하고. 딱히 집회가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일상생활에서 거길 점유하는 행위가 굉장히 재미있죠. 도로를 막아 놓으면 사람들이 빠글빠글 하잖아요.

SQC 시위하는 기분? 불법을 저지르면 약간의 카타르시스가 좀 있잖아요.

강예린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끔씩 최소의 집 얘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좀 슬퍼요. 집을 어떻게 최소로 규정하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 최소의 집에 꼭 살아야 되나? 최소를 어떻게 규정해? 그러니까 우리가 최소라는 걸 너무 긍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베드 하나 들어가고 테이블 있으면 최소일까요? 이게 정말 다르잖아요.

조동섭,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오가는 호모의 사랑

SQC 그러면 다른 곳에서 만날 수도 있는데 왜 종로에서 자주 만날까요?

조동섭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유는⋯ 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종로를 처음 나와서 “살 거 같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너무 편하다, 살 거 같다. 자기는 한국에는 이런 곳이 없는 줄 알았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있으니깐. 그리고 어떻게 얼굴을 안 보고 얘기를 하겠어요. 앱이랑 암만 해도 다르죠. 백날 이야기를 해도 글이랑 아주 다른 사람들도 많죠.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달라지진 않았던 거 같아요. 20세기까지만 해도. 아, 그런데 너무 옛날이다. 20년 전이네 벌써. 2020년까지 살 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데.

SQC 왜요?

조동섭 생각을 해봐요. 20대 때는 그렇잖아, 50살인 자신을 상상할 수 있어요? 못하잖아.

SQC 그렇죠. 그 전에 그냥 끝나도 되겠다. 끝나도 뭐 나쁠 게 있나? (…) 종로3가가 정말 피크였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은 점점 줄어들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앱이나 SNS는 점점 활성화되고 있어요. ‘종로3가가 과연 필요한가? 이런 공간이 계속 있어야 하는가?’ 하는 목소리도 들리고요.

조동섭 그게 필요하다, 필요치 않다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만약 호모들이 다 얼굴을 당당히 밝히고, 연인끼리도 어디서든 뽀뽀를 하고 그러고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필요 없겠죠. 그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게토(ghetto)가 필요한 거잖아요. 그리고 게이 업소가 모여 있다는 사실도 꽤 중요한 것 같아요. 가끔 그런 생각들 하지 않아요? 게이 술집이 왜 꼭 종로3가에만 있어야 하나? 우리 동네 가까운 데에 번화가도 있는데 왜 거긴 없나? 사실 여기저기 하나씩 생겼다가 사라졌어요. 성균관대 앞에도 있었고, 혜화로터리 쪽에도 있었고, 고대 앞에도 있었고, 제가 알고 가본 곳만 해도 그래요. 다 오래 못 가더군요. 그게 아무리 단골 장사라고 해도 한 곳만 딱 들르는 재미로 가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 가면 그 거리 전체가 해방구 같다, 내 단골집에도 들르고 다른 집에도 갈 수 있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거 같아요. 해방구 역할. (…) 사실은 연애하면 술집 안 가잖아요. 연애하면 오히려 더 우리 둘이서 어디선가 같이 술을 마시면서 밥을 먹으면서 뽀뽀도 하고 싶고. 하지만 또 친구들 인사시켜 주러 나가야 되고, 일부러도 가고 뭐 그런 거잖아요. 그게 과연 없어질 수 있을까? 없어질 순 없죠, 당연히. 뭐 필요없다/필요하다의 문제도 아니고. 왜 클로짓이나 디나이얼이 이렇게 많은가에 대해서는, 그건 뭐 당연히 사회가 그렇지 않으면 클로짓이 되지 않는 거죠. 그런 사회가 오면, 게토가 필요없게 되겠죠.

티오, 청소년 퀴어가 궁금하세요?

SQC 저는 청소년기에 가장 힘들었던 게 주거 공간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단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약간 거짓말하는 기분도 조금 들었고요. 왠지 모를 죄책감 그런 것도 있었고요.

티오 인권 관련 공부를 하면 언론 기사들을 많이 찾아봐야 되는데, 그럴 때마다 숨어서 보곤 했어요. 이때 약간 죄책감이 들었어요. 사회에 나가 내 목소리를 내고, 규탄하고 그러는데, 집 안에서는 또 조용한 사람이 되니까. 그게 좀 많이 죄책감이 들었어요.

SQC 굿즈라든가 홍보물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집에서 어떻게 보관하나요?

티오 그런 거 지금 숨겨 놓고 있어요.

SQC 개인 방에요?

티오 제가 퀴어 인권 운동도 하지만 인권 운동 안에서 다시 여러 인권이 있잖아요. 청소년 인권도 있고, 성소수자 인권도 있고, 위안부 인권도 있는데, 제가 위안부 인권 활동도 해서 굿즈들이 많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크게, 한 곳에 섞어 모아놔도 성소수자 굿즈는 좀 숨겨 놓는? 인권 얘기할 때도 분명히 난 80%는 성소수자 인권하는데 굳이 꼭 다른 거랑 엮어 조금 더 숨기는?

SQC 그쵸. 왜냐하면 어느 정도 우리도 방어기제를 만들어야 되고 보호막을 만들어야 되기도 하잖아요.

블·휴고·온스, 퀴어가 아니어도 괜찮아

가게를 운영하면서 보니 1층이 주는 장점이 점점 더 많이 생기더군요. 장애인 분들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시기도 하고요.

휴고 저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베리어 프리.

정말 의도하지 않았는데 턱이 없어서 들어오셔서 시간 보내고 가시는 걸 볼 때 1층 하길 잘한 거 같다.

휴고 이런 게 필요하구나. 그러니까 소수자 안에 소수자들이 있잖아요. 특히나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 그런 얘기를 저희한테 해주셔서 많이 배웠죠.

휴고 그때까지는 잘 몰랐었어요. 그런데 아 1층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생각해보니까 1층 바가 드물더군요.

휴고 드물고 또 올라갈 때 거의 다 턱들이 있죠.

SQC 그러면 공간을 구하실 때 처음부터 게이바 또는 퀴어바로 계획하신 건가요?

휴고 처음부터 했던 생각은 사실 게이바가 주변에 많잖아요? 근데 이따금씩 저희도 손님일 때 가서 앉아서 보니까 다른 성별을 가진 분들이 들어왔을 때 저지당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지 않았어요.

요즘 트렌드가 아니죠.

(…)

휴고 그런 것도 있고. 요즘 노키즈존처럼 어떤 조건에 따라 입장을 거부하는 곳이 있잖아요. 그런 경험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운영 방식이나 형태상 퀴어프렌들리할 순 있겠지만 “모두가 올 수 있는 곳”으로 하자는 것이 시작할 때의 생각이긴 했어요. 처음 준비할 때 이것저것 생각들을 하잖아요. 그래서 가게 슬로건이라든지 키워드를 “웰컴 올”로 하자고 해 시작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요.

퀴어 안에서도 저희가 게이니까 보통 게이들이 대부분의 손님이긴 해요. 어쨌든 여성 손님이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성별의 분들이 오시더라도 자연스럽게 “여긴 와도 돼”가 되면 좋겠는 그런 의도가 있어요.

휴고 저는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도 했어요. 저희가 퀴어들을 만나기 시작한 게 10년이 넘어 15년 이렇게 되지만 생각보다 주변에 아는 레즈비언이라든지 또는 바이 섹슈얼이라든지가 없거든요. 어쩌다 보니 다 게이들만 아는 상황이어서 좀 더 알고 싶단 생각도 많았어요. 다른 사람, 다른 성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서로 간의 관계를 지속해도 연대가 될 수 있는 집단이잖아요. 그래서 좀 알고 싶다, 그러면 우리 안에 없는 걸 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오시면 사실 좀 반가워요.

(…)

비-퀴어도 차별받지 않는 그런 공간을 만들려고 했어요. 커밍아웃도 요즘 주변 헤테로 친구들한테 많이 하니까. 같이 올 수 있는 공간. 여기도 보면 그런 식으로도 많이 오더라고요.

도균, 존재의 위계, 공간의 위계

도균 그런데 나를 설명하는 말, 이 말을 고정적이고 단단한 개념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가요? 다들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싶어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는 게, 역으로 현실 트랜스젠더들의 삶을 안 좋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 그게 내 목표점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탐구하는 이유가 어디 딱 도착해야 될 데가 있어서, 도착하면 갑자기 “아 난 이제 찾았어, 완벽해.” 이런 게 아니잖아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나를 탐색하고 나를 알아가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고. 나와 나의 몸, 나와 내 삶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이 저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봐요. 트랜스젠더랑 동성애자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나요?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트랜스젠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데, 레즈비언 공동체의 문화나 이런 어떤 부분들보다 장애운동이나 이주운동을 볼 때 엄청 와 닿거든요. 이주운동에서 그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제가 겪는 어떤 문제들이 비슷한 구조로 만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저쪽이랑 같이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근데 LGBT라고 묶을 때, 너무 당연히 이 개념이 연결되어야 할 거 같고 이 안에서 어떤 개념이 들어가고 빠지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리잖아요. 단순히 문화적 차이라고 단정하는 게 싫은 거예요. 사실은 경제적 차이나 정치적 차이, 사회제도적 차이 같은 것들이 훨씬 더 크게 있고, 거기에서 오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있는데, 이걸 어떠한 문화라고 하는 순간 경제적인 차이 안에 존재하는 문제나 구조, 정치적인 차이 구조 이것들이 아무것도 문제시되지 않고 싹 사라지죠. 그게 기만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죠.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어떤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나? 이 안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이게 단순히 어울리기 힘들기 때문일까? 예를 들어 상업 공간 중심으로 게이 공간, 퀴어 공간이 구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그렇다면 그 공간을 너무나 명확하게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돈 없는 사람들은 못 가잖아요.

이동현, 서울에 거주할 권리

SQC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두고 홈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동현 이 질문의 답은 저희가 평소 힘주어서 자주 하는 이야기예요. ‘홈리스행동’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요구하고 주장하는 바의 큰 부분을 설명하는데 노숙인으로 한정 지은 상태로는 불가능하죠. 노숙인은 이슬 맞고 자는 사람인데, 그렇게 되면 지하도에 사는 사람들은 노숙인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노숙인을 좀 더 넓게 얘기하면 주거가 없는 사람들만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사실 한 개인의 1년을 놓고 보더라도 역동적으로 변하거든요. 예를 들어 쪽방에서 한 2개월 살다가 거리 노숙을 몇 달 하다가 또 노숙인 생활시설에 몇 달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노숙인으로만 국한해 접근하면 누수되는 인원이 굉장히 많아지고, 당사자들을 급속히 잔여화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노숙인을 비적정 주거, 즉 주거로서 적절치 않은 곳에 사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들여다봐야 하고, 그래서 홈리스라는 개념을 쓰자는 겁니다. 또 노숙 상태, 즉 무주거 상태로만 기준을 잡고 그에 맞춘 한정된 정책만을 시행한다고 했을 때 쓸 수 있는 카드의 폭이 굉장히 좁아져요. 그러니 더 넓은 개념을 가져와 그에 대한 포괄적인 정책을 쓰고, 그렇게나마 해야 당사자들이 갖는 낙인감이 많이 줄어들어요.

SQC 도시재생도 사실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동현 재생? 재생이 된 게 뭐가 있어요? 돈이 좀 몰렸지만 그게 재생이에요? 그게 쇠퇴 사업이잖아요. 돈의동 새뜰마을 사업을 보면, 결국 쪽방상담소만 마징가제트처럼 멋지게 생겼지 그게 주민들 주거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나요? 원래 그렇게 할 계획도 아니었거든요. 실제로는 주거 개선도 해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그렇지 않고 있죠. 애초에 거기를 공공주택지구로 확 지정을 해서 바꿔 버려야지, 실컷 재생해 봤자 돈만 아깝고요.

SQC 저는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도꼭지 달아 주고, 자물쇠 달아 주고 그런 것들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이동현 쪽방상담소 복지만 좋아졌지 쪽방 주민 복지는 하나도 안 좋아졌어요. 옛날이랑 똑같아요.

임정원, 계속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임정원 이곳에서 여성들을 만날 때 가끔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혐오와 차별, 폭력의 문화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의 거리에 녹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성매매 업소는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일상의 공간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는데, 종묘 지역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 착취의 수요가 있는 곳에는 공급이 따르고 여성을 재화 삼는 알선자들을 통해 가장 취약한 대상들이 공급의 타깃이 됩니다. 가출 청소년, 미성년자, 지적장애인, 가난한 나라의 외국인 여성, 80대 여성까지 성매매를 알선하고, 조장하는 성 착취 구조의 특성이 종로나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남의 대형 룸살롱에서부터 아직까지 운영되는 미아리와 영등포의 성매매 집결지, 쪽방 쪽의 성매매 현장, 가난한 외국인 여성을 고용하는 마사지 업소, 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맥양주집, 채팅 앱으로 이뤄지는 온라인 기반 성매매. 이런 복합적이고 압도적이기까지 한 성매매의 모습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버닝썬과 성접대의 상징이며, 견고한 성산업의 자본과 투자를 용이하게 확장시키는 세계적인 성매매 산출·유입·매개의 도시임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또한 종로3가는 성 착취 대상이 되고 있는 중․고령 여성들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여성을 소비하고, 추행하는 것을 ‘놀이’와 ‘여가’로 인식하는 성구매자들이 구성한 공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범죄와 차별, 폭력이 공간을 만드는지는 망각한 채 표면적으로 드러난 여성들에게‘만’ 관심을 갖거나, 혐오와 비난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 결국 종로3가, 더 나아가 서울의 견고한 성매매 구조를 유지·지속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퀴어콜렉티브 프로젝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2019년 가을부터 2020년 여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세미나다. 도시 내에서 퀴어 공간“도시는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지만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는 서로 각기 다른 이미지의 총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는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밀집한 공간이기도, 교통체증과 혼잡이 심각한 공간이기도, 경제적 기회가 풍부한 공간이기도,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각한 공간이기도, 맛집과 문화시설이 많아 생활하기 즐거운 공간이기도, 그리고 환경오염이 심각한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도시학자들은 도시에 대한 파편적 이미지를 넘어 도시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도시사회학자 워스(Wirth)는 도시를 정의하는 주요 요소를 큰 인구 규모,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사회적 이질성이라고 봤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유입되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공간이 도시라고 했다. 그렇다. 도시는 그야말로 다양성, 이질성, 차이 그리고 낯섦의 공간이다. 도시에는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다. 이들은 매일 매우 밀접한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맺고 생활한다. 우리는 매일 각양각색의 옷차림과 외모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같은 길을 걷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을 요리하고, 우리가 걷는 길을 청소하고, 우리의 집으로 택배를 해 주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하거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는 같은 건물 또는 동네에 사는 이웃이 몇 명인지,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이처럼 무수히 많고 다양한 도시구성원들이 각자 자유롭게 생활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더 흥미롭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 있다. —송태수, 도시계획으로 바라보는 퀴어 서울,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개인의 역사를 통해 공간의 역사를 다시 보려는 다양한 연구자들의 발표와 개인들의 경험이 제각기 다른 주제하에서 논의됐다. 그외에도 이 팀은 두개의 참여형 웹 페이지를 통해 개인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는데, 평평하게 겹쳐진“서울에는 수많은 종로3가가 있을 것이다. 서울에는 수많은 타자가 있을 것이다. 서울이 타자의 공간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배제하는 언어로서 타자의 담장이 아닌, 스스로 타자-되기를 통해 담장을 부수어 아래부터 전복하는 타자의 공간으로 읽히기 바란다.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도시의 빈 곳들이 보인다. ‘서울이라는 기억’이 마치 중간 중간 까맣게 지워진 것 같다. 도무지 복구할 수 없는 기억. 기억의 구멍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주위를 돌아보며 이 도시를 걸어 보자. 이제 일상에서 도시를 걸으며 이 은밀한 역사를 발견하고, 적어 내려가 보자. 도시는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는 다수의 타자들이 걸을 때 생산되므로 우린 모두 도시 생산자다. 우리가 걸을 때 도시는 자라난다. 서울이라는 큰 판의 위와 아래로, 올라가고 내려가며, 다양한 시간의 등고선을 만들어 보자. 우리의 걷기 안에서 이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서울이, 이 도시가 조금은 더 이해되지 않을까.” —김정민, 당신의 종로3가는 어디인가요?,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이 개인들의 내밀한 이야기와 목소리로 감성적 공감을 자아낸다면, 당신은 어떤 궤적을 그리고 계신가요?[방문] (프로그래밍: 김수환)는 단순하고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젠더퀴어들의 위치 지형을 확인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멤버: 서울퀴어콜렉티브

© 이강혁
  • 권욱은 대학에서 연극과 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대학원에서 ‘연극적 상황’과 ‘영화의 장소’에 관해 탐구 중이다. 미학적 관심사와 일상에서 사회/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행위를 접목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2019년부터 서울퀴어콜렉티브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퀴어 공간으로서의 종로3가를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 김정민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포함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건축 행위를 시도한다. 책으로 부피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며, 인터넷 공간을 통해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 남수정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미디어 문화 연구를 전공했고, 신자유주의적 도시 개발 정책이 도시 공동체를 해체하는 방식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 종로3가 익선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수 집단의 미시사를 취재해왔고, 학위 논문으로 서울 도심 타자 공간의 문화 정치: 종로3가를 중심으로를 썼다.
  • 정승우는 대학에서 조경학을 공부하며, 건축과 도시 재생에 관심이 많다. 도시 재생의 기능적 대안을 찾기 위해 도시 재생 관련 활동에 참여했으며, 도시 공간의 여러 정체성을 탐색하기 위해 서울퀴어콜렉티브에 합류했다.

비평: ‘타자’와 ‘타자-되기’ 사이 빗금의 연대

1.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에서 서울퀴어콜렉티브가 집중하는 공간은 종로3가다. 구성원들의 경험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각각의 문제의식이 모였다는 선택의 배경은 ‘장소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명제 위에 있기도 하다. 관계를 만들고 자원을 확보하며 일상을 채우고 자신을 명명하는 장소는 나에게 밀착됨과 동시에 공동의 삶이 교차하고 유행과 규준에 의해 상징적 이름으로 소구되면서 비판적 거리를 벼려내도록 한다. 필자 역시 종로3가에 어느 정도 경험을 걸쳐왔다고 한다면, 이 글은 종로3가에 정도를 달리할지언정 어느 정도 연루된 자리에서 시작할 것다.

종로3가는 풍경보다는 상이한 지층들이 종횡으로 쌓이고 부딪힌다. 여기에는 악기 상가와 파고다 공원과 송해길이 있으며 더 오래전에는 요정이 있고 성매매 여성들이 자리를 펴왔고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 주도하에 시작한 ‘나비 작전’ 아래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는 게이 업소들이 들어서며 ‘금토일 장사하는’ 공간이 지속되다 최근 익선동 붐업과 함께 다른 풍경들을 마주하고 있다. 종로3가는 지리학적으로 교통의 중심이자 사대문 안 도심 부지만, 주변 지역에 비해 가난하고 낙후된 공간으로 인지되기에 자본이 투입되고 지역 활성화의 대상 지역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2018년 발표한 창덕궁 앞 도성한복판 도시 재생 활성화 계획에서 종로3가와 돈화문로 일대를 ‘수도 한양의 정치적·지리적 중심’이자 ‘3·1 독립 선언이 거행된 대한민국 탄생의 기초가 된 장소’, ‘1980년대 이후 국내 최대 귀금속 산업 밀집 지역’, ‘최근 익선동을 중심으로 젊은 층이 유입되며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장소’로 설명하며 물리적·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개발의 청사진이 종로 3가가 낙후 지역임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은 ‘쪽방촌, 모텔촌, 어르신 밀집 지역’을 낙후하고 이질적인 집단으로 꼽으며 사회적·심리적 단절 요인으로 전제한다. 취약하고 빈곤하게나마 삶을 일궈온 양식들을 가치절하하는 와중에도 성소수자와 같은 이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곧 활성화의 당위 아래 장소를 구성해온 이들을 타자로 배치하고 자본과 젊은이-대개는 비장애를 가진 소비 가능한 이성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과거를 패션으로 소비하며 매력자원을 홍보하고 전시하겠다는 포석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간 종로3가를 찾는 이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삭제하고 증발시킨다는 문제의식이 형성되는 가운데,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소비의 주체로만 시민이 배정됨을 인지하고 구성원의 면면을 다시 그려내며 실천으로서 다른 역사기록의 가능성을 찾는다.

김정민, 깊고 기우고 기만한 건물들

과거 구성원들의 삶은 낙후됐고 빈곤하고 비위생적이며 퇴폐적 공간이라는 가십적 표현에 가려지고 그 자체로 표상된다. 사료와 기사 등의 자료는 종로3가의 거시적 풍경 속에 이들을 배제하거나 아예 황색저널의 먹잇감으로 삼아 부정적 가십으로 소모한다. 자료의 척박함은 장소의 척박함을 가리킨다. 종로3가는 수다한 미사여구가 덧붙여진 이미지로 선전되지만 그만큼 장소적 빈곤함을 노출하며, 근본적으로는 안전과 복지가 닿지 않는 생존의 사각지대를 은폐한다. 그런 점에 서울퀴어콜렉티브를 구성하는 ‘퀴어’는 성소수자 정체성의 통념적인 울타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태도의 문제를 지향하는 듯하다. 이는 정상성과 개발주의의 도시정책과 장소구획으로부터 사람들이 올곧이 배치되거나 구성되지 않는 점에 주목하는 데 나아가 비정상과 가난과 같이 배제를 정당화하고 수행하는 수사들로부터 어떤 목소리들이 출현하고 있으며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 파고드는 복수의 시도다. 이들은 하나의 길을 내기보다 채널과 방법론을 다각화해 종로3가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온갖 분야에서 접근한다. 예의 방법론은 그들이 ‘콜렉티브’를 내건 동기로 작동했을 터.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자료와 통계, 기사들이 한켠에 남긴 낙인의 표상과 삭제된 빈자리의 행간으로부터 종로3가를 재발굴한다. 이들은 종로3가의 시공간이 결코 한 방향으로 요약될 수 없다는 점을 들며 온전한 재현이 비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온갖 위계의 목소리가 뒤엉켜 시지각적으로 소란스러움에도 여전히 채 포집되지 못한 목소리가 종로3가에 명백하게 존재’함을 밝히며 자신들의 작업을 일종의 고고학적 시도로 표명한다. 그것은 낙후된 장소로서 종로3가를 읽고 이를 왜 낙후함으로 배치하고 배제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수행인 바, 이는 장소를 미끄러지고 더러는 한시적으로 점거해 온 노인과 게이대중매체에 간혹 가다 재현되는 성소수자는 노년의 얼굴을 하고 있던 적이 없다. 가령, 처음으로 게이 캐릭터를 내세우면서도 흥행했다고 평가받는 왕의 남자에서 최근의 윤희에게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에서 성소수자의 얼굴은 중년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드라마, 만화, 소설 등을 막론하고 소수의 예민한 정치적 의식을 지닌 작업들이 아니고서야 노년은 좀처럼 성소수자 재현의 지평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게다가 인권 담론의 영역에서도 성소수자란 낡은 기성세대의 정치를 전복하는 ‘젊은 세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지만, 정작 우리의 조/부모 중 성소수자가 존재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노년의 게이를 만나 본 적이 없을까? 게이라는 종족이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임동현, 쪽방 주민을 읽는 시도로 연결된다. 무시되거나 삭제된 자리를 가늠하고, 때론 우연히 발견할 섬광 같은 조우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작업은 나아가 의식적으로 지금의 목소리를 모으고 담아내는 작업으로 연결된다. 공문서와 주류 언론에 담기지 못한 주변화된 목소리, 개발과 시민권의 경계 바깥에서 경계를 구성하는 이들의 목소리, 이미 오래전부터 종로3가에 터를 잡고 활동하고 모이며 사람들을 만나 온 이들의 기록을 담고 지역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쟁점들을 발굴하는 방식은 내부 연구와 세미나뿐 아니라 당사자 인터뷰와 숙의, 설문과 해시태그 등을 통해 목소리와 이야기를 취합하는 여러 방식을 망라한다.

2. 서울퀴어콜렉티브의 전시는 다양한 접근을 두 축으로 구성한다. 타자의 연대기(2020)에서 종로3가를 둘러싼 거시적 역사와 함께 종로3가의 역사, 성소수자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한다면, 평평하게 겹쳐진(2020)© 타별사진관은 전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당신에게 종로3가는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지속적으로 모아낸 이야기들을 음성언어로 낭독하는가 하면, 무빙 텍스트로 구성해 시청각적 배치를 시도한다.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간격만 남겨두고 성기게 배치한 스크린에 소리들이 부딪히면서 각각의 이야기가 그 내용을 확실하게 알아듣기 어렵게 만든다. 스크린 사이로 부딪히는 소리들을 들으며 거니는 경험은 흡사 종로3가의 담장 사이를 거닐며 수다한 목소리에 둘러싸이는 감각을 전시에 옮겨낸 것처럼 보인다.

전시 전면에 등장하는 키워드는 ‘타자’다. 이는 종로3가를 비틀어 읽는 과정에서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장소를 거슬러 읽고, 장소에서 끝없이 지워진 이들로서 타자의 윤곽을 그리며 ‘납작하고 평평하게 압축했던 타자들의 일상과 문화의 부피를 다시 부풀려서 그들의 시간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는’ 작업에 집중한다는 포석일 것이다. 타자성은 비정상성으로 밀려나 단절적이고 불안정한 삶의 리듬을 강제당한다. ‘어떤 인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적·경제적 지원체계 탓에 남들보다 더 많이 고통받으며 상해, 폭력, 그리고 죽음에 더 많이 노출되는, 정치적인 문제로 초래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불안정성은 사회구성원의 삶을 위축하고 사회적 협상력을 박탈함으로써 외부로부터 단절과 고립을 초래한다.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 속에 타자로 밀려나는 이들은 동시에 불안정한 삶에 종속된다.

작업에서 타자는 크게 두 방향으로 설명된다. 먼저 연대기 그래프가 개괄한 종로3가의 역사는 개발 논리와 정상성을 통치 규범으로 삼고 기념비화하며 거주민을 강제적으로 배제하고 밀어내는 타자화의 궤적이 있다. 타자화된 이들은 주로 대상화된 단어들로 기록되거나 빈칸 자체로 남는다. 다른 축에는 배제된 타자의 위상을 전유하며 ‘타자-되기’를 실천하는 목소리와 이야기들이 배치된다. 이는 접근에 있어 물리적, 시간적 거리에 있어서도 쓰임이 다르다. 가령 연대기에 성소수자는 머뭇거림 없이 타자로 호명하지만, 이야기를 남긴 참여자로서 성소수자에게는 타자의 호명을 곧이곧대로 씌우기보다 타자-되기의 실천적 명명으로 표상한다. 그것은 근간의 연표에 기록되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역사가 제도의 편입을 요구하기보다 시민권과 국민의 기준 자체를 비판적으로 묻는 시도들에 조응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런 구분이 온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적 권리가 배제되고 삭제되는 상황을 ‘타자화’한다고 말하는 것은 기록되지 않았을지언정 이들이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때 타자의 위치에서 주체적 실천을 도모했을 미시적 행동들을 일축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타자-되기’는 타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의 주체적 행위를 전제한다. ‘~되기’로서 타자는 아직 발화되지 않고, 도래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한 상태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타자의 실체를 단정하기보다 타자성의 전략적,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타자화된 이들이 권력의 지형으로부터 협상력을 확보할 수 없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기 어려운 이들, 차라리 다른 이들의 언어로 설명되고 그렇기에 끝없이 오염되고 이미 오염돼버린 이들이라면, 타자-되기는 규범성에 저항하며 타자의 자리를 끝없이 비판적 주체의 자리로 인식하며 발언권을 획득하고 발언의 효과를 확보하는 전략적 명명인 것이다. 일련의 독해는 타자성이 주체성의 반대에 있는 절대값으로 작동하기보다 양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양자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집단적 정동이 추동하고 다시금 사회적 위계에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타자로 호명되고 외부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절차 속에서도 타자와 주체를 가르는 조건으로서 권력의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 수반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로3가에서 살아왔고 적을 두며 드나드는 개별 구성원들이 타자와 주체의 이분법으로부터 저마다 상이한 위치에 있음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취합한 이야기를 전시함에 있어 이들은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들을 활용해 타자화된 이들과 타자-되기를 실천하는 형식을 상이하게 창안하고 배치하는가 하면, 이들 간 감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음성언어의 한켠에는 큐알코드를 통해 음성들의 백색소음 속에서 간명한 프로필과 문자텍스트로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타자성과 정치적 주체의 공간적 위상을 변별적으로 선보이는 작업은 과거의 장소성을 복원하거나 재연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연표에 비어있거나 언표화하는 데 실패한 타자의 공간을 내밀한 말들이 채워지도록 한다. 타자로서 폐제된 과거를 현재의 자장 위에 옮겨내는 작업은 자원의 척박함과 강제적인 주변화 속에서 소음으로 취급돼 온 목소리들을 발굴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요청하며, 삭제하고 침묵을 강제하는 권력으로부터 지금의 화자들이 어떤 형식으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고려하도록 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종로3가에 대한 역사를 복원하기보다 역사연구와 사료들이 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지 비판적으로 거슬러 읽는 고고학적 실천에 부합한다. 이는 빈자리의 실체를 소환하기보다 비어있고 가십과 낙인으로 오염된 자리를 가리키는 비판적 관점으로 오늘의 장소를 다시 읽는다.

그렇게 찾아낸 이야기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됐던 경험이자 고립되기 쉬운 조건에 대한 진술이며 이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장소들을 확보해나갔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목소리들은 물리적 장소성과 더불어 온라인 위에 저마다 발화가 머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며 족적과 흔적을 남긴다. 이는 오늘의 종로3가가 행정적 장소성에 국한되기보다 개인의 지향과 애착, 친밀함을 형성하는 공간임을 상기시켜준다. 전시장에 한정하지 않으며 온라인으로 촉수를 뻗어내 허공 위에 산포시키는 개인의 내밀한 말들은 물리적 장소로서 종로3가를 가로지르는 가상의 영토를 구성한다. 척박한 삶의 환경으로부터 모아낸 구성원들의 말은 삶의 안전과 결핍을 느끼지 않아도 될 장소성의 언어를 채운다. 집합적 재잘거림은 날 선 적대를 표하기보다 빈칸에 맴도는 소음들의 공명을, 그것이 결국 종로3가를 찾는 개인들의 언어임을 확인케 한다.

3. 전시는 최종 결과물이기보다 이들의 활동을 공간으로 옮겨낸 또 하나의 산출물이다. 프로젝트와 함께 출간한 단행본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2020)와 웹사이트는 전시와 더불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한다.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종로3가에 걸친 도시 개발, 주거, 인류학, 사회학적 기반의 이야기들을 도표와 연보, 통계, 연구자료, 인터뷰, 숙의, 토론, 설문, 인포그래픽 등으로 맵핑해 메시지의 층을 두텁게 한다.

결과물들은 도시 재생 속에서 삶의 환경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려내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어떻게 재구성하는가를 취합한다. 여기서 고려할 지점은 일차적으로 프로젝트에 접근하고 응답할 이들은 아마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친숙하고 이를 중심으로 창발하고 유통되는 퀴어와 커뮤니티, 현대미술 등에 어색하지 않은 대상으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망각된 목소리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장소의 조건과 환경 속에 삶의 양태들을 만들어왔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SNS를 운용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참여형 캠페인을 중계하고 연동하는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들이 취합한 종로3가는 지배적인 기호의 체제로부터 개입의 틈을 벼리며 끊임없는 접합의 실천이 열어낸 가능성의 장소로 거듭난다. 해석되고 소비되면서 끊임없이 덧붙여지고 거듭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공간은, ‘종로3가’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시작하지만 또 다른 종로3가들을 발굴하고 공유한다. 이는 경리단길의 젠트리피케이션이 향후 여러 ‘~리단길’이라는 밈으로 반복되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꺼져가는 패턴을 반영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하부와 구석의 정동들을 이끌어냄으로써 성장주의 경제로부터 적대적인 실천 가능성을 타진한다.

물리적 장소의 범주를 벗어나 온·오프라인을 오가며 일탈과 안전을 도모하는 공간의 문장들을 취합하는 작업은 상이한 성적 지향과 세대, 지역과 계층과 직종의 이들이 장소에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상념을 모아낸 것의 총합이자 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소의 이름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오늘의 목소리들은 집합적으로 출몰하며 장소의 규범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제됐던 불온하고 불안정한 삶들을 틈입시킨다. 발화를 통한 존재의 호소는 종로3가의 담장 틈새로 비유되는 스크린 사이마다 유령적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기획은 좀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방향 없이 상호 간섭하며 내용 잃은 목소리들, 반대로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개별의 텍스트들은 집합적으로 모여 서로를 분간할 수 있지 않을까. 목소리의 화자들은 익명으로 처리되며 대개 자기침잠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들은 안전을 도모하는 중에도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장소에 개입하고 그 과정에 개입당하며 관계를 만들고 연결을 확보하며 쾌락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 점에 장소성의 탐색은 동시에 종로3가에 적을 두며 거주하고 지나쳐가며 한시적으로 점거하는 이들의 주체성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서울퀴어콜렉티브는 제도적으로 배제되고 가십으로 대상화돼 밀려나는 이들을 타자로 호명하지만, 이들이 대상으로 삼는 소외된 장소의 타자들을 온전하게 벌거벗기고 삭제된 순수한 타자로만 박제할 수 없다. 커뮤니티 안팎에는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장치들을 학습하고 운용하며 자신들의 공간임을 천명하는 실천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질문을 세공해보자. 연대기적 시간표에 드리운 가려진 삶의 그림자들을 개인에 국한한 익명성의 자기 침잠적 목소리와 삶의 동선으로 표상해내는 것은 개별 주체들이 현장에서 실행하는 정치적 주체성과 연결가능성을 미루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장소를 점유하는 이들의 능동적인 수행을 함께 다루기보다 개발 논리와 정상성 규범에 밀려난 타자의 프레임에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익명의 목소리로부터 ‘차이를 가로지르는 집합적 의지’를, 집단의 정동이 방향을 갖고 공간을 규정하는 수행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관객들은 책자에 실린 건축가, 문필가, 반빈곤 활동가, 게이업소 사장,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인터뷰와 기고문을 참고해 전시장에 한데 엉킨 목소리들의 지층과 성좌를 짚어볼 수 있다. 하지만 출판물에 담긴 구체적인 문장은 허공에 산포되는 목소리의 익명성과 비중과 무게를 달리하며 의도치 않게 위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정을 보장하는 지배규범을 거스르고 저항하며 타인-되기를 실천하는 것은 불안정성으로부터 고정된 정체성을 부착하며 안정을 확보하는 정체성 정치의 전형적인 프레임과 다른 갈래의 정치적 효과를, 일테면 광장을 점거하는 집단의 목소리에 정치적 역능을 부여할 수 있다. 일테면 이들은 SNS를 활용해 자신의 삶에 있어 안전과 협상력을 확보하지만, 동시에 SNS를 통해 가속화되는 장소의 유행과 소비적인 기호를 향유하기도 한다. 게토의 문화가 시민권을 얻는 과정 속에 다른 규준과 문화적 언어에 충돌하게 될 때, 그것은 보존과 삭제의 긴장 속에서 정체성의 영토를 비판적으로 읽고 상호 간의 변화를 모색하며 자신의 안녕을 확보해나갈 것이다. 이는 고립된 부족의 언어를 넘어 서로 간 협치와 경합을 거듭하며 관계를 갱신해가는 이른바 ‘연대’의 궤적을 그려낼 수 있다. 그런 점에 ‘~되기’로서 타자의 실천은 각자의 이야기를 흐리지 않고 맥락을 증발시키지 않으며 안팎으로 교섭해 쾌락을 추구하고 취약함을 따지고 울타리의 문턱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공동체의 구성으로 확장한다. 이는 장소를 구성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엮이고 조직되며 당파성을 형성하는지, 통치규범을 바탕으로 하는 개발 논리와 타자화 사이에 ‘잡다한 민중’이 본래 가지고 있는 ‘밀집(cogestion)’과 ‘근접성(propinquity)’으로부터 도시가 어떻게 ‘군거 공간’을 형성하는지, 저마다 상이한 담론들이 서로 간에 어떻게 협상하고 경합하는지 읽어내는 과정을 바탕으로 삼을 것이다.

結. 서울퀴어콜렉티브의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2020년에 이르러서야 국가기관에서 퀴어의 이름과 언어를 공적으로 발화하게 됐다는 의의를 갖는다. 동시간대 같은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2020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년 5월 22일~8월 22일) 또한 퀴어를 주요 키워드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것이 단순히 부분적이고 일회적인 현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는 오랜 시간 삶의 양식을 모색하며 여러 영역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 퀴어의/퀴어한 자기 표현과 공적 요구의 성과인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작업은 현재 국공립 미술관에 퀴어의 자리를 배치하기까지 거쳐온 지난한 시간과 오랜 외침을 기록한 결과물이라는 의의 또한 획득한다.

동시에 우리는 타자로서 공적 공간에 출현하는 것이 공공성의 우산 아래 인정받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관객들은 전시장 밖 현장의 온도와 낙차를 확인하고 다시 엮어내야 하는 비평적 지점을 지나칠 수 없다.단적으로 전시는 지난 6월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에서 진행한 참여형 프로그램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방문]에 성소수자 혐오세력과 트랜스 배제적 그룹들이 반대구호와 폭력적인 이미지를 다량 업로드하며 소란이 일었던 상황이나, 전시를 진행하는 같은 기간 신촌역에 걸린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BIT) 기념 광고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방문]가 수차례 훼손되고 다시 부착되는 문화·정치적 쟁투 상황을 소환한다. 광고와 온라인 이벤트는 코로나19로 대중운동이 제한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방안이자 플랫폼과 시장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메시지 전달 방식이었지만, 공격과 위협의 긴장 속에서 본의 아니게 한시적 점거의 성격을 획득하게 됐다. 일련의 상황들은 미술관이 폐쇄적인 전시장에 국한해 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결국 전시 또한 현장의 낙차를 인지하면서 정치적이고 전술적인 이벤트로 소환되고 재해석되며 새로운 행동과 실천을 모색하는 계기가 돼야 함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 미술관에 들어와 있는 서울퀴어콜렉티브의 기록은 그저 빈자리를 드러내고 교차하는 음성을 감각케 하는 것 너머 기록 자체가 실천이 되고 있음을 인지하며, 그것이 다른 불온한 실천들과 어느 정도 온도 차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피고 이로부터 어떻게 연결을 도모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토크: 스스로 여기 있다

서울퀴어콜렉티브를 만나기 전, 그들의 전시와 작업물을 받아 봤을 때, 그 작업 범위의 방대함에 놀랐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으며, 살펴볼수록 더욱 맥락이 많은 작업이었다. 종로3가를 중심으로 그 안에 숨겨진 여러 맥락을 섬세하게 살펴보며 다양한 목소리를 겹치고, 그로부터 아직 나오지 못한 목소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일련의 작업에는 일종의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대체 어떤 열의가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어쩌면 그들 자신도 작업이 이처럼 커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꼭 묻고 싶었다. 왜 종로3가였느냐고.

황인찬 우선 ‘종로3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죠.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라는 제목의 출판물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까지 했잖아요. 저는 ‘종로3가’라는 공간을 선택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퀴어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는 작업이라면, 이태원을 포함해서 다른 공간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죠. 그래서 종로3가를 특정한 건 당연히 나름의 맥락이 있을 거라 짐작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남수정 저희가 팀을 이루고 종로3가를 특정했다기보다는 종로3가 때문에 저희가 모였다는 게 더 맞아요. 모두 종로3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우연과 인연이 더해져 모였거든요. 저는 대학원에서 공간-문화연구를 공부했고, 종로3가를 중심으로 도시 공간과 문화 생산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논문을 썼어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종로3가 중에서 특히 익선동의 젠트리파이(Gentrify,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인 젠트리[gentry]가 상대적으로 못 사는 사람들의 거주지에 파고 들어가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소비자로 참여했다고 스스로를 인식했죠. 익선동에 ‘식물’이나 ‘열두 달’ 같은 가게들이 처음 생겨난 2014년부터 그곳을 드나들었거든요. 그런 곳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내고 찾아다니는 것에 기쁨을 느꼈고, 나름대로 ‘힙스터’라고 자부했던 거죠. 그러면서 게이 친구들에게도 “내가 좋은 데 알려줄게.”라면서 익선동의 어떤 곳들을 추천했어요. 그러면 그들은 “거기 금요일마다 가는 곳인데.”라며 이미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죠.

황인찬 아! 그때 그렇게 공간이 겹쳐진다는 걸 안 거군요.

남수정 네, 처음 안 거예요. 그후로 주위를 다시 돌아봤더니, 당연하지만 여기 원래 살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힙스터로 제가 소비한 아름다움이나 새로움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걸 의식하게 됐죠. 저는 처음부터 외부자였고, 이곳에 침입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권욱 익선동은 제게 굉장히 사적인 공간이었어요. 여기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생겨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상에 큰 위기감을 느꼈죠. 제게 의미 있는 공간이 변한다는 점에서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며 이곳에서 영상 작업을 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남수정 전시에서도 같은 공간에서 각자 다른 위치와 의미를 지니는 모습이 드러나요.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힘들이 계속 부딪히고 충돌하는 ‘투쟁의 장’이기도 하죠. 저희 멤버들도 그 안에서 마주친 거고요. 그렇게 저희는 ‘종로3가’라는 공간을 더 깊이 파고들었고, 이곳을 통해서 ‘힘의 투쟁들’이 서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황인찬 저는 ‘익선동이 뜬다’는 소식을 조금 뒤늦게 접했어요. 가끔씩 놀러가는 곳이긴 했지만, 그 공간에 누가 살고, 또 누군가는 밀려나간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는 못했어요. 젠트리피케이션 관련 뉴스를 보고 나서야 ‘아, 내가 무심코 지나가던 그곳도 당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뒤늦게 깨닫기도 했죠.

김정민 저도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주로 한적한 밤 시간대에 가고,결국 골목길 따라서 술집에 가게 되니까 딱히 여기에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까진 못했어요. 오히려 트위터 같은 데서 익선동의 오래된 곳들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특히 ‘월인공방’이 사라진다고 하기에 익선동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체감했어요. 제가 자주 갔던 게이바 바로 옆이었거든요.

황인찬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공간이 겹쳐 있고, 서로 얽혀 있다는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가 분리된 상태이기도 한 거네요. 여러 개의 층위가 나눠진 것처럼 말이죠. 그런 측면에서 서울퀴어콜렉티브(이하 SQC) 작업이 그 분리된 상태를 다시 흩뜨려놓는 과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변화 자체가, 그 나눠진 층위들을 어떤 식으로든 훼손하는 것 같아요. 모든 경계를 없애버려서 다 동질화시켜버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김정민 퀴어 공간에서 흥미로운 점은, 방금 말씀하신 여러 층위의 레이어라고 생각해요. 이태원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워낙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많은 동네니까 시끄럽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주거 공간은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크게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분리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멀리서 보면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서로 단절돼 있는 모양새였죠.

남수정 종로 같은 경우,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어요. 탑골공원 어르신도 근처에 게이 스트리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돈의동 쪽방촌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죠. 하지만 서로의 일상에 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를 보이지 않게 분리하는 경계 공간들이 분명히 존재해요.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처럼 거대한 자본이 도시 공간의 여러 레이어를 균질화시키는 작업들이 몇 년 동안 계속 진행됐던 거죠.

황인찬 제게 퀴어 공간이라면 떠오르는 곳은 종로와 이태원, 그리고 신촌 공원입니다. 신촌 공원들도 한때 중요한 퀴어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유플렉스 등 대규모 멀티플렉스 시설에 밀려버렸죠. 지금의 신촌과 비교하면 종로가 갖는 상징성이나 특별함이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퀴어 퍼레이드가 신촌보다 광화문이나 시청에서 시작해서 종로 일대를 행진하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거든요. 물론 여성 퀴어들은 생각이 다르겠죠. 어쩌면 제가 퀴어 공간을 찾아 종로로 나갔던 시기가 신촌 공원이 사라지는 시점과 맞물려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비교적 빨리 종로로 나온 경우인데요, 중학교 3학년 때쯤 처음 종로를 나갔거든요. 종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퀴어 공간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퇴적된 곳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제가 어릴 때 찾아간 종로와는 또 다른 것 같더라고요. 작업을 통해서 종로3가의 변화상을 살펴보셨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눴으면 해요.

남수정 종로3가 낙원동을 중심으로 게이 커뮤니티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죠. 이미 1960년대부터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있어요. PC통신 이전부터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던 바들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알음알음 이곳을 찾고, 기껏해야 삼삼오오 모이는 정도였어요.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PC 통신이나 온라인 카페 같은 데서 대형 커뮤니티가 생겼고, 오프라인 모임도 활성화되기 시작했어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죠. 그래서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거고, 넓은 술집에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런 술집이 있던 곳이 바로 종각 쪽이었고요.

황인찬 맞아요. ‘지구촌’, 그런 큰 술집들이 있었죠.

남수정 낙원동 게이 스트리트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게 큰 홀이 없어요. 그러니까 큰 홀이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거죠. 연령대가 높은 게이들은 여전히 낙원동에, 젊은 게이들은 종각과 공평동 쪽으로 몰려들면서 세대 분리가 생긴 것같아요. 하지만 공평동이 재개발되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지면서 다시 낙원동 쪽으로 젊은 세대들이 유입되고, 그러다 보니 그곳에도 큰 술집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황인찬 제가 볼 때, SQC의 작업 중심에는 ‘퀴어 공간을 사유하는 일’이 있다고 봐요. 동시에 ‘퀴어 공간의 퀴어성’을 또 다른 소수자들과 약자들로까지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작업들의 맥락을 아우르는 방식을 말하자면, 퀴어 공간을 주제로 다루기 위해서는 퀴어와 공간을 따로 분리해서 사유하는 게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하고, 거기에 ‘종로3가’라는 장소의 특정성과 역사성이 더해져 방대한 작업이 됐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종로3가는 주제로 삼을 만하지’ 생각했다가 작업 면면을 살펴보니 그 맥락이 너무 방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결국 ‘사람-시간-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작업이 돼야 하는데, 사실상 이 모든 것을 다 담을 순 없잖아요.그렇다면어떤 식으로든 각각의 지점들에서 한정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퀴어는 퀴어의 범주대로, 공간은 공간의 범주대로, 그런 식으로요. 이 관련한 고민들, 그러니까 범위를 한정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궁금해요.

권욱 각자 생각이 조금씩 다를 것 같아요. 저는 ‘퀴어’라는 것 자체부터 확장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전 작업에서 어떤 부채감이 있었어요. 마치 핀셋으로 꼽는 것처럼 종로3가 내의 게이 이야기만 꺼냈거든요. 다양한 사람과 층위가 존재하는 데도 말이죠. 어느 시점부터 지금의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상황들이 개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들을 했죠. 그러면서 전작처럼 게이 이야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겠더라고요. 결국,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구조를 면밀히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퀴어를 젠더 또는 섹슈얼리티로만 보는 게 아니라 좀 더 확장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야 구조가 보일 테고, 조금이나마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퀴어’의 개념을 확장한 상태로 접근하면, 너무 많은 것들이 모두 포괄될 테니 ‘종로3가’라는 공간성 안에서 이야기해보자,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일단 저는 그랬는데, 다른 멤버들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남수정 저는 일단 ‘도시 문제’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잘 알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아니면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을 하기도 하잖아요. 사람들 많이 찾는 거리에 임대료가 올라가서 사람들이 쫓겨난다 정도로 말이죠. 또 ‘재개발’이라고 하면 오래된 건물 헐고 새 아파트 짓는 정도로만 생각하고요. 사실, 그 안에 다양한 힘들이 충돌하고, 여러 층위의 문화들이 존재하잖아요. 그걸 알아야 문제를 공유하고, 비로소 연대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그동안 세미나를 진행하고, 책을 만들고, 전시를 연 것도 결국 이런 도시 문제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런 활동을 하면서 언제나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들을 고민했고요. 가령, 전시작품 중에서 타자의 연대기는 나의 연대기를 스티커로 붙여가면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돼요. 참여형 웹사이트 당신은 어떤 궤적을 그리고 계신가요?에서는 참여자가 자신의 공간을 설명하고 일상의 모빌리티의 흔적을 찍어 보게 하고요. 그런 식으로 ‘이 도시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라는 인식을 일깨우기를 바라죠.

김정민 ‘퀴어 공간’이란 말은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데, ‘종로3가’라고 하면 구체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 같아요.그런 면에서 오히려 더 쉬운 선택을 했다고도 생각해요. 그럼 종로3가의 퀴어를 어떻게 담을 건데? 타자를 어떻게 담을 건데? 그런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고,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힘들 수밖에 없죠. 저희가 택한 방법은 사람들을 나열하고 그 개인들에게 압축된 시간과 공간을 주목하는 거였어요. 물론 ‘누구를 택할 건데?’ 계속 함께 고민하고, 최대한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포함시키려고 노력했죠.

황인찬 말씀을 들으니 이 작업이 범위를 정해놓고, 탐구해나가는 과정이기보다는 나름의 역사와 시간, 메시지를 이미 지닌 존재들을 골라서 독자나 관객들에게 흩뿌려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확장되고요. 그동안 세미나, 웹, 출판, 전시,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작업들을 했잖아요. 이 방식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방대한 작업들을 최대한 많은 범위에서 잡아보기를 바라며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먼저 세미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김정민 1차 세미나 도시 기록과 사회 참여(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2019년 11월 22일)SQC는 모두 네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연구를 확장해왔다. 도시의 역사는 기록자와 기록의 대상이 대개 전형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주목되지 못한 보통의 일상을 기록하고자 하는 실험적인 기록자들이 존재한다. 첫번째 세미나 도시기록과 사회참여에서 SQC는 각 연사들과 도시를 기록한다는 행위가 사회참여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살펴봤다. 첫 번째 세미나와 함께 SQC는 ‘도시 기록자’로서 추구해나갈 방향을 고민하며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를 진행할 때, 서울을 기록하고 있는 작업자 김영준, 이인규, 장영주 세 분을 발제자로 모셨어요. 각자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궁금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죠. 2차 세미나 퀴어 공간, 기록하기?!?(서울시 청년허브, 2019년 12월 1일)두 번째 세미나는 서울시 청년허브와 공론장의 형식을 빌려 서울에 존재하는 성소수자의 공간과 그들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젠더퀴어 당사자들은 파편화됐던 개별 담론의 틈에서 그 동안 다뤄지지 못한 퀴어 공간의 존재와 공간성을 직접 발화할 수 있었다. ‘종삼’ 또는 ‘이태원, ‘신촌 놀이터’나 ‘마포’처럼 지역 특정적으로 이해되던 퀴어 공간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고 퀴어공간을 다시 당사자 각각의 직접 발화을 통해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해봤다.는 퀴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퀴어 공간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계속 쌓이는 의문에서 시작했어요. 3차 세미나 걷기-말하기-듣기(SQC 유튜브 채널 생중계, 2020년 5월 23일)세 번째 세미나 걷기, 말하기, 듣기에서는 도시의 정상성에서 이탈한 타자들이 서울 공간을 점유해온 미시적 역사에 대해 구술하는 시간을 가졌다. 타자들의 인생 구술 라이브 토크쇼는 도시 소수자의 공간사를 기록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이성애자 남성, 문화, 학력 등의 사회적 자본을 획득한 공인된 기록자로서의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대안적 역사 기록의 새로운 시도였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통치 주체들은 특정 집단을 정상성 규범 아래에서 강력하게 타자화했지만 타자들의 인생은 서울 공간을 분명하게 점유했으며 인생이라는 긴 시간은 자신의 문화와 일상을 생산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전시와 맞물려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들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구체화됐습니다. 4차 세미나 서울 다시 짓기마지막으로 네 번째 세미나 서울 다시 짓기에서는 지난 세미나들을 거쳐오며 발전시켜온 질문을 던진다. ‘배제되는 존재가 없는 서울을 건설할 수 있는가. 젠더, 자본, 정치, 사회, 문화적 권력을 가진 다수자와 그 반대에 위치한 소수자, 정상과 비정상, 일반과 비일반과 같은 이분적 접근을 넘어서서 개별 도시인들이 그대로 도시에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이론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고민을 나눠봤다. 이로서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고 더욱 도전적인 시각으로 서울을 다시 지어보고자 한다. [영상 보기]까지 그동안의 세미나는 일차적으로 저희의 궁금증을 해소하거나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권욱 2차 세미나 때 어떤 분이 본인은 퀴어지만 어느 공간에도 소속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요. 특정 공간에 소속된다는 건 결국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명확한 정체성이 필요한데, 그런 구분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는 거죠. 퀴어 안에서도 다시 퀴어인 셈인데요, 그런 존재를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 생겼어요. 이렇게 세미나를 통해서도 ‘퀴어’라는 정체성과 개념을 확장해야 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죠.

남수정 저도 2차 세미나 때 어떤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어요. 신체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논바이너리인 분이 레즈비언 바에 놀러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파트너로서의 가능성 여부를 따지는, 일종의 대상화를 겪고 무척 불편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분 입장에서는 ‘나는 여성도 아니고, 레즈비언도 아닌데, 그럼 어디로 가야 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런 사람에게 퀴어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김정민 이럴 때는 ‘퀴어’라는 말이 정체성을 밝혀주기보다는 오히려 다 뭉개버리는 것 같아요. 그 단어가 모두에게 동질하게 적용될 수 없으니까요.

남수정 그래서 3차 세미나에서는 각각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차원으로 접근하게 됐어요. 정치적인 힘,문화적인힘,경제적인힘등그런힘들이 몰아치는 서울에서 자신의 일상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살아왔는지 인생 구술을 들어보는 거죠.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마다 존재하는 푸코적인 저항성을 확인하게 됐어요. 각자 나름대로 일상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작은 의미와 맥락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함부로 다 뭉개고 없애버릴 수 없는 ‘생산의 저항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때론 사람들이 쉽게 ‘나는 트랜스젠더가 싫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잖아요. 누군가는 그렇게 존재하는데, 그걸 다른 사람이 ‘좋아요, 싫어요’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싫어함’ 속에서도 그 존재는 계속 살아가고, 자기들만의 공간과 문화를 가꾸고 있어요. 그런 모습이 저항성처럼 보였어요.

황인찬 이야기를 들으니 퀴어 공간을 기록하고 탐색하는 것이 자칫 ‘구획 짓기’가 되지 않도록 고민을 많이 하셨군요. 그런 면에서 세미나가 전체적으로 작업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고요. 그럼 출판물과 전시 이야기를 해보죠. 저는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타자의 연대기였어요.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서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매우 방대하고 거시적인 관점이 연동되는가 하면, 또 어떤 지점에서는 매우 사적인 영역에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면이 있더라고요.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어요.

남수정 일단 해방 이후로 기점을 잡은 건, 근대적인 도시 개발 계획이 시작된 시점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타자의 연대기가 거대한 시간에 발을 들이게 됐죠.

권욱 도시 개발을 통해서 그동안 한국 정부가 추구해온 방향성을 파악하고, 그 흐름에서 이탈되거나 해체된 것들을 살펴보려고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성’을 추적해보고 싶었죠. 동시에 퀴어들의 역사는 어떻게 편입될 수 있을지 교차해서 바라보는 걸 상상했어요.

김정민 도시 개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정부가 생각하는 도시, 반대로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타임라인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인 삶은 어떻게 개입시킬 수 있을까 고심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퀴어와 직접 연결되는 내용들은 노란색으로 표기했어요. 예를 들어, ‘동성애’라는 말은 언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을까 살펴본 내용들이 거기에 포함되죠. 1990년대까지는 어떤 문서에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찾기 어려운데, 1990년 후반에 폭발적으로 빈번하게 등장해요.

황인찬 정리하자면, 현대적인 국가가 계획한 도시 개발에 전제된 정상성이라는 큰 줄기를 파악하고, 그 흐름에서 이탈된 개인이나 움직임을 최대한 기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이 타임라인이 출판물에서는 정상성을 중심으로 퀴어와 퀴어 공간에 대한 사유들을 계속 전개시켜주었다면, 전시에서는 이 타임라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강조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통계를 활용한 작업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그게 실제 리서치 기관의 통계를 가져온 거잖아요. 제가 의아했던 점은, 일반적으로 ‘보통’, ‘중간’에 해당되는 보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건 명확하게 호불호로 나눠지더라고요.

남수정 사실 이 통계는 다른 분이 작업하신 거지만, 기획 의도를 보면 사회학적 통계를 내려고 한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중립값이 존재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호불호만 있는 거죠. 근데 어떻게 호불호를 물을 수가 있겠어요? 호불호로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잖아요. 어느 연예인이 좋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사실 딱히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싫어할 이유도 처음부터 없는 거죠. 이 통계가 이상하지만, 사회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봐요. ‘난민 좋아? 싫어?’ ‘성소수자 좋아? 싫어?’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도 답하면서 통계가 도출되잖아요. 우리가 굳이 난민과 성소수자를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싫어할 이유도 없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해요. 그 사람들이 비상식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유도하는 것이 사회 문제라는 거죠.

황인찬 만약 정책 관련에 여론을 파악하는 통계에 중간값이 있고, 사람들이 중간값에 몰리면 정책 결정할 때 별로 도움이 안 되잖아요.그런식의통계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겨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 또 다음으로 넘어가보죠. 전시장 한쪽에는 흰색 스크린 패널이 설치되고, 다른 쪽에서는 빛을 쏘고요, 그 사이에는 계속 소리들이 울리도록 구성했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목소리들이 나왔다 사라지고 하는 와중에 빛은 패널을 채우기도 하고, 때론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사라지더라고요. 이게 목소리가 어딘가에 닿는 순간을 가시화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 공간에는 있는 목소리들은 마치 ‘종로3가가 아니어도 난 여기 있음’ 또는 ‘내가 있는 여기 이곳이 종로3가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결국에는 ‘종로3가’와 상관없이 모두 ‘내가 여기에 있다’로 귀결되는 것 같았고요. 이렇게 목소리들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김정민 우선 전체적인 배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패널 뒤로 숨어 있는 공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숨겨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가 들리면 좋겠다 싶었죠. 전반적으로 일률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크스페이스 같은 느낌이길 바랐어요.

남수정 저는 종로3가에서의 보행 감각을 많이 떠올렸어요. 종로3가를 걷다 보면 숨겨진 뒷골목이 많잖아요. 그 뒷골목을 의식해서 바라보면, 막상 아무것도 없고. 계속 알아채지 못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요. 굉장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소리들이죠. 전시장에 천과 스크린을 약간 미로처럼 설치해서 동선이 매우 다양해졌죠. 그게 종로3가의 보행성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처음에 내가 아는 길로 갔는데 나중에 보니 몰랐던 사람들이 있었고, 궁금해서 미로 같은 공간을 들여다보고 말이죠. 거길 들어갔을 때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요. 종로의 보행한다는 것이, 타자의 공간을 보행한다는 것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어요.

황인찬 저는 화면에 마치 뿌려지는 것 같은 텍스트도 재밌게 봤어요. 작은 화면에 텍스트 여러 줄이 지나가잖아요. 속도가 다른 것처럼 보였는데, 맞나요?

권욱 네, 어떤 부분은 빠르게 지나가고, 어떤 부분은 좀 더 길게 봐야 되는 식으로 조정했어요.

황인찬 여러 텍스트들이 동시에 ‘이게 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동일한 텍스트가 여러 시간축에 뿌려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어쨌든 각자가 여기에 있음과,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앞으로 더 커져갔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한편으로는 출판물이든 전시이든 그 내용이 웹과 밀접하잖아요. 아마도 웹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했을 것 같은데요, 웹을 하면서 고민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김정민 종로3가를 다루면서 우리가 담지 못하는 것들을, 계속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인식하게 됐어요. 우리 지인들을 동원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목소리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웹은 확장성을 위해 선택한 거죠. 그리고 웹은 좀 더 쉽게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보다 간단하고 어떤 감정을 직접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방식을 고민했어요.

남수정 저희가 지속적으로 했던 다양한 활동들은 결국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과정이었다고 봐요. 그런 측면에서 웹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기에 중요했죠. 또 종로와 이태원 등 특정한 퀴어 공간뿐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일상 공간이 있는데, 그걸 웹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웹에서 퀴어링을 해보기도 하고, 종로가 아닌 서울의 다른 공간도 퀴어 공간이 될 수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죠.

김정민 말씀하신 대로 각자 일상 공간이 있고, 노는 공간들도 다 제각각이잖아요. 그럼에도 공간에 위계가 존재하고, 특정 공간에 몰리는 경향성이 있죠. 종로나 이태원, 홍대쪽으로요.

황인찬 말씀하신 대로 퀴어 공간은 서울 중심으로, 서울에서도 종로, 이태원, 몇몇 장소들이 중심이죠. 하지만 SQC의 작업은 ‘퀴어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 사람들 각자가 살아온 곳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네요. 한편으론, 어떻게 보면 21세기의 진정한 퀴어 공간은 웹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종로3가와 이태원이 웹을 보조하는 수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김정민 웹은 진짜 퀴어 강국이죠.

남수정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연대표에 미디어나 디바이스를 넣을지 고민하기도 했어요. 미디어와 디바이스의 발달이 많은 영향을 주잖아요. 근데 그건 너무 편중된 시각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빼긴 했지만요. 요즘에는 ‘잭디’나 ‘틴더’ 같은 채팅 앱이 있다면, 전에는 PC 통신, 그 이전에는 매거진이 있었죠.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퀴어 공간, 퀴어 문화에도 변화가 생겨나고요.

황인찬 전시장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그런 수많은 정체성들이 가능해지는 건 미디어의 발달, 즉 웹의 등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웹의 민주화’를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 덕분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표출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또 웹과 연결된 작업은 무척 중요하고도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이제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SQC의 작업은 ‘종로3가’라는 공간을 재현하고 모사하는 과정인 동시에 모사의 불가능성을 다시 재현하는 방식으로 펼쳐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남은 과제도 있을 것 같아요. 또는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김정민 저희가 전시 설치 마치고, SQC의 활동 계획에 대해서 8월부터 슬슬 생각보자고 했는데, 아직 정리된 건 없어요. 어쨌든 저는 여태까지 했던 세미나를 정리해서 책이나 뭐든 만들었으면 해요.

황인찬 자료집 형태로 두껍지 않게 나와도 좋을 것 같긴 해요.

권욱 아니면 진짜 두껍게 나오든지.

황인찬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시구나. (웃음)

김정민 저희가 작년 3월에 처음 모였을 때는 막연하게 종로 다음에는 마포, 그 다음에는 이태원 하자, 비서울도 해보자 그랬거든요. 지금은 그게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일종의 퍼레이드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퍼레이드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잖아요. 그런 퍼레이드의 공간성을 활용하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긴 해요.

남수정 종로3가 이후의 장소, 퍼레이드 등 저희는 계속 공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SQC가 구성원이 명확한 팀이기보다는 일종의 네트워크 형태라고 봐요. 저희와 관심사를 공유하고, 저희 활동에 공감하는 개인이나 그룹이 있다면 함께 활동해도 좋을 것 같아요. 콜렉티브 안에서 계속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거죠.

황인찬 이것도 일을 키우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남수정 그런가요? 그런데 저희가 꼭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는 건 아니니까 꼭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팀 안에 뚜렷한 중심 세력이 없어도 하나의 공감대 아래에서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모였다 흩어지는 형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권욱 SQC의 구성원이 누구냐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 그룹이냐 그런 규정도 중요하지 않고요. 어쩌다 보니 이번에는 전시도 하고 미술의 방식을 사용한 것뿐이죠. 그래서 SQC가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기대돼요. 지난 일 년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그랬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나 다루려는 이야기에 따라 태도와 방식이 자유롭게 달라질 테니까요. 그런 가능성이 잠재된 집단이 되기를 원해요.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작업이 보여준 것과 같이, 퀴어가 스스로 여기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선언적 행위들이 서울퀴어콜렉티브의 작업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퀴어콜렉티브 전시장의 타자의 연대기에는 관람자들이 남기고 간 수많은 선언과 목소리, 증언과 삶이 붙어 있다. 이런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 자체가 결국 서울퀴어콜렉티브가 바라던 한 장면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여러 레이어 속에 감춰진 서로의 삶을 더욱 잘 이해하기, 그리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보다 많은 목소리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상상하기.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차세대 창작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새롭게 선보이는 공모사업으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협업하는 형태의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한다. 2019년에 두 팀을 선정한 것을 시작으로 매해 두 팀을 5년 동안 선발하고 지원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은 첫 번째로 선발된 두 팀, 강남버그와 서울퀴어콜렉티브의 프로젝트 결과물을 소개하는 전시다. 다음 공모는 2020년 말에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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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Hashtag 2020

Hosted by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and sponsored by Hyundai Motor, Project Hashtag is an innovative public contest to promote multidisciplinary collaboration and support the next generation of Korean artists.

The hashtag (#), which was originally devised to help people find or sort information on social media, has quickly evolved into a dynamic tool for creating and sharing user-generated expressions with unique meanings. Embracing this open and active spirit, Project Hashtag will choose two teams of young creators from various fields each year (for a total of five years) to receive sponsorship for major art projects.

Project Hashtag 2020 introduces the first two selected teams: GANGNAMBUG and Seoul Queer Collective (SQC). Coincidentally, both teams proposed projects that focus on a specific district of Seoul: Gangnam and Jongno 3-ga, respectively. Beyond a mere geographic territory, every region contains its own mix of unique stories and social issues, and can thus serve as a microcosm for the wider problems of our world. By sharing these stories, we can begin to gauge where we stand in the present, and where we hope to go in the future.

GANGNAMBUG
Lee Jungwoo, Lee KyungTaek, Park Jaeyoung, Kim Nayoun

© Lee Kanghyuk

The team of GANGNAMBUG views Gangnam as a strange anomaly—like a computer bug—that unexpectedly emerged through the urban development of Korea. With its astronomical real estate prices, luxury shops, and renowned private education facilities, Gangnam has come to symbolize the materialist desires and mainstream culture of contemporary Korea. By creatively tweaking the images and values associated with Gangnam, GANGNAMBUG sheds new light on the district and lifestyle that “everyone wants to enjoy and destroy at the same time.”

If One Climbs Up and Up

2020, 3 Channel Video (synchronized), 15min 37sec, color, sound, 4K/FHD

As the district of Gangnam continues to grow, a number of high-rise buildings are currently in development, including plans to construct a massive 105-story structure (595meters) with a goal of completion in 2026. To answer the question, “What does the world look like from 569 meters high?,” the artists conceived If One Climbs Up and Up, which uses drone recordings to imagine the unfathomable size of the building. Peering down at the world from such an incredible height, the project evokes a stratified message about the human desire for ascension.

GANGNAMBUS

2020, Participatory Art Project, 2 Channel Video (synchronized), 51min., color, sound, 4K

Offering visitors a fresh perspective on the Gangnam district, GANGNAMBUS is an interactive bus tour that was presented on June 25, 2020, running from Hyundai apartments in Apgujeong to Cheongdam-dong, Daechi-dong, Guryong Village, and Gangnam Station. At each of the four stops, the tour guides assume different roles—as actors, singing instructors, and working mothers, for example—in order to share unique stories about the respective area. Looking at the real scenery of Gangnam, hearing the personal stories of the guides, and recalling their own memories and perceptions, visitors gain a deeper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of this one-of-a-kind neighborhood.

Win, Lose or Draw: The Drawing Competition

2020, Participatory Art Project, Drawing Installation, Single Channel Video, 30min 34sec, color, sound, FHD

Prior to the 2000s, one of the standard entrance exams for art school was “plaster drawing,” in which students were required to draw plaster casts from memory. In the 1990s, however, the number of private art prep schools sharply increased, until such tests no longer offered a special challenge. At the same time, simple representation came to be seen as an antiquated form of art evaluation. As a result, most art institutions eliminated plaster drawing tests from their entrance requirements. Although plaster drawing tests may have been abandoned, the rigid system of private prep schools geared towards college entrance exams remains in place. To remind us that any skill or knowledge acquired simply for test purposes loses its original meaning, Win, Lose or Draw is a participatory competition that seeks to restore the fun and enjoyment of drawing. Visitors to the Seoul Box of MMCA are asked to draw a plaster cast within a time limit. The submitted drawings are then posted online, where they are ranked according to people’s votes. Through this familiar process, Win, Lose or Draw shows that forcing students to memorize“proper” drawing techniques for an exam eliminates the true pleasure and purpose of drawing.

Anesthesia Gangnam

2020, Research, Architectural Plans, Drawings, Model, etc.

Since the 1970s, the district of Gangnam has rapidly developed from the rural outskirts of Seoul into one of the world’s busiest urban and commercial centers. Taking the unique perspective of urban architecture with no regard for the current landscape, Anesthesia Gangnam examines architecture that exists only as paper, in the form of plans, blueprints, and photographs of structures that were never realized or have already been torn down. What were the ideas of the architects presented with the limitless opportunities of Gangnam? Following the example of the architect Le Corbusier, who compared urban planning to a surgical procedure, Anesthesia Gangnam classifies its“paper architecture” in medical or surgical terms, considering architectural structures as forms of metastasis, intergradation, anesthesia, and transplantation.

Seoul Queer Collective
Kwon Wook, Kim Jungmin, Nam Soojung, Jung Seungwoo

© Lee Kanghyuk

Seoul Queer Collective (SQC) is a project team with a particular interest in minority groups that have been“Other-ized”and marginalized through rampant gentrification around Jongno 3-ga since 2016. The team applies the name“urban queer” to all minority residents or workers of Jongno 3-ga who have been labeled as undesirable or detrimental to the beauty of the city, including homosexuals, flophouse residents, homeless people, female prostitutes, and the poor and elderly in Tapgol Park. The goal of SQC is not only to visualize the existence of these urban queers who have been spurned by the city’s hierarchy, but more importantly, to embrace them as neighbors.

Seminars

Through the course of this project, Seoul Queer Collective is hosting four seminars. To open the proceedings, the first seminar, Urban Archive and Social Participation (November 22, 2019 at MMCA Residency Changdong), initiated a conversation about the social meaning of recording cities. In partnership with Seoul Youth Hub, the second seminar, Recording Queer Space (December 1, 2019 at Seoul Youth Hub), discussed the afforded spaces and daily lives of sexual minorities in Seoul. Notably, gender queers themselves directly documented the existence and conditions of queer space in Seoul, issues that have long been ignored in the fragmented individual discourse. In the third seminar, Walking-Talking-Listening (streamed live on May 23, 2020 on the Seoul Queer Collective YouTube channel), participants talk about their own experiences and histories in certain parts of Seoul. Finally, Re;building Seoul (July 2020) proposes a new perspective for establishing an urban community that nurtures the daily lives of urban queers.

Others, Jongno 3-ga

© Song Yousub

2020, Book, 188x144, 282 pages

Seoul Queer Collective began this project by questioning how to fairly and accurately document a specific city space. The group’s efforts to answer this question led to the publication of this book, which recreates a walk through Jongno 3-ga, combining newly interpreted visual materials with the stories, thoughts, and experiences of the neighborhood’s diverse inhabitants.

Drawing The Trajectory of Your Life

2020, Participatory Webpage

By entering your age, gender, and other information on the website above, you can map the “trajectory” of your life, from your place of birth to your current home, along with sites of various other social activities. This project shows how the trajectories of various lives overlap within the regional boundaries of Korea. In particular, by looking at the trajectories of gender queers, we can see that their lives and activities are not bound to any specific space. [Visit] (Programming by Kim Suhwan)

Chronology of Others

2020, Graphic Installation

By juxtaposing the history of Others from the Jongno 3-ga area with the world and national history that we are generally taught, this timeline attempts to locate the stories of Others within the grand narrative. The audience is encouraged to participate by adding their own history to the timeline.

Flat-Overlapped (Sound and Text Projection)

2020, Participatory Webpage, Sound and Text Installation

One of the critical purposes of the Seoul Queer Collective project is to collect and give significance to the voices of everyday people from Jongno 3-ga. While gathering the stories of such individuals, Seoul Queer Collective came to realize that Jongno 3-ga is not merely a physical space, but rather a concept or phenomenon that is constantly evolving and expanding. Based on this perception, Flat-Overlapped attempts to expand the general conception of Jongno 3-ga through an interactive online project, where people can share their own response to the statement “My Jongno 3-ga is _______.” [Visit] (Programming and design by Kim Kyuho)

Voice of the Strata

2020, Sound Installation

The arbitrary or unexpected sounds that we hear while walking down the street can sometimes become embedded in our memory and impression of a city. Voice of the Strata is a sound installation that attempts to “visualize” Jongno 3-ga through fragments of interviews and other recordings gathered by Seoul Queer Collective as part of Project Hashtag. Emanating from a speaker in an idle space of the museum, the sounds draw curious visitors and help them to re-imagine Jongno 3-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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